발효된 울음에 대하여
배용제

늦은 오후의 공원,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울음이 빠져나오려고
노인의 어깨를 흔들며 출렁거린다
완전하게 숙성된 술처럼 맑고 진한 것들,
뚜껑처럼 단단했던 이가 삭아버린 틈새로 쏟아지는
을음을 틀어막으려
두손으로 입술을 움켜쥐며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가슴을 허물려 터져나온 것들이
앙상한 손가락을 비집고 줄줄 흘러내린다
값싸고 독한 술처럼,그러나
잘 정돈된 공원의 풍경만 잠깐씩 기우뚱거릴 뿐
이렇게 흔해빠진 광경에 지상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쏟아지면 금세 증발해 버리고
사소한 흔적도 남지 않는 울음,
어쩌면 저승의 누군가를 향해
고스란히 바치는 몇 잔의 祭酒는 아닐는지
지독한 취기에 저녁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울음은 끝내 멈춰지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고여왔던 것일까
세상의 온갖 독한 효소들이 스며들어
뼈를 삭히고 생을 삭히며 숙성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분노를 밀봉한 채 이를 깨물었던 것일까
서늘한 바탕에 저장된 내용물에 대해
조금 더 고급스런 상표를 찾아 떠돌았지만
결국 싸구려 표정이 창백하게 붙어 있는 얼굴
저 울음을 발효시킨 일생의 용도는 끝났다
비워낼수록 가벼워지는 노인은
이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울음에 몰입한다
그 누군가 날마다 무덤의 뚜껑을 열고 닫으며
저장된 목숨을 오래오래 숙성시켜
달콤한 몇 방울의 원액을 빨아들이는 먼 곳에서
몰려온 어둠이 노인을 완전히 감쌀 때까지.

배용제 시인은 1963년생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는 날마다 전송된다'로 당선되며 등단, 민음사에서 펴낸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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