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전통 두레패 일산동구 성석동 ‘성석농악 진밭두레보존회’

▲ 공연이 끝나고 환호하는 진밭농악두레패. 2005년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진밭마을 주민들은 두레가락 원형을 복원하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다.

최소한 1865년 이전부터 성석동 진밭에는 두레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농촌공동체를 유지시키고 활성화 할 수 있는 두레조직이 있었을 것이다. 항일운동의 기반이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공동체를 약화시키고자 억압하여 잠시 사라졌다가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성석동 진밭두레패의 농기 끝에는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지금도 태극기를 달고 있다.

두레는 해방과 동시에 다시 부활해 20여 년간 농촌에서 활기차게 행해졌지만 70년대 이후 도시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두레로 소개되는 것은 마을 두레패가 김매러 나갈 때 치던 활동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석동 진밭마을에서 나고 자라 어려서 두레대원으로 활동했던 신유희씨는 “김매기 때 두레가 총 출동하지. 대원은 우리 동네 젊은 사람들이 하고, 김매기가 다 끝나면 두레심을 봤어”라고 말한다. 또한 “두래패가 김매러 나갈 때 기수,상쇠, 부쇠, 재금, 태징, 북, 장구 순으로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우장 걸머지고 호미를 들고 따라가지. 태징이나 북 장구 등을 치고 가는 잽이들이 호미를 들어주는 거지. 도착하면 기를 기준으로 석 줄을 매 놓고 깃대 밑에다가 태징 놓고 그 위에 장구를 놓는다고, 장구 위에 북을 놓는 거지. 상쇠 부쇠는 기 줄에 매놓고, 재금은 장구 사이에 끼워놓지.”라며 당시 두레패가 김매러 나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이제는 마을 논김을 매기 위해 두레패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던 두레가락을 지키고, 해체되어가는 공동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2005년 7월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2호로 등록되기까지 진밭마을 주민들은 두레가락 원형을 복원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선소리꾼도 많고, 가락을 전수받을 수 있는 40대 젊은 층도 어느 정도 있다. 부녀들도 두레활동에 적극 협조해주었다.

▲ 진밭두레의 농악은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향토문화재로 문화적 진화를 이루었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진밭두레패가 해오던 대보름놀이가 10회째 이어져오며 고양시의 전통문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행사 때마다 예산을 비롯해서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계속해오고 있다. 이계희 수석부회장은 “우리 부락에 내려오는 것도 못 지킨다면 너무 무능력하지 않나!”라며 마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통을 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재완 진밭두레보존회 회장은 “마을 사람들만의 힘으로 진밭두레의 전통을 이어가기 힘들다”며,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어느 정도 지원을 받으며 책임지고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진밭두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총무 김수정씨는 “농악은 전통이고 민족문화이고 민족혼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혼이 빠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며 진밭두레의 보존은 단순히 마을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넘어 “우리민족의 혼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제5차 발표회 때 어깨춤을 추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 최고 아니냐!”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던 신유희 고문의 모습처럼 회원들의 이런 자존심이 오늘의 진밭두레를 있게 한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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