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로 해법찾는 도시재생6. 공동체가 살아나는 행복한 개발 / 발리문 사람들의 갈등 소통 대화

▲ 발리문의 도시재생 과정이 ‘주민참여’를 충분히 고려했다고 설명하는 지역재생공사(BRL) 사람들. 그러나 사업 지연 과정에서 시와 BRL이 갈등을 빚었고,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듣기만 했지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1975년부터 40여년 정도 이 지역에 살았다. 지금은 철거 대상인 타워 블럭(15층 고층아파트)이 세워질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입주 자격조건이 있었다. 직업이 있어야하고 전과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이곳이 낙후되면서 좀더 나은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고, 직장이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됐다.”
발리문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주민 마이클(Michael)씨의 이야기다.
15년 동안의 도시재생 사업이 마무리되고 있는 발리문. 낡은 임대아파트를 떠나 추가 비용없이 새 주택으로 옮기게 된 발리문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도시재생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5일 공동기획취재단은 더블린시의회와 지역재생공사의 주선으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주민들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지난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발리문 도시재생, 시·공사 갈등
“주민의견 듣고는 반영 안해”
15년 경제위기·철거지연 악재
공사 해산뒤 커뮤니티 역할 기대

중앙난방, 공원있는 주택 만족해
주민과의 대화를 위해 커뮤니티를 전담하고 있는 지역재생공사의 공무원 브라이언(Brian)과 60년을 이곳에서 산 캐시(Cathy)와 마이클(Michael), 커뮤니티 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조(Joe), 드니스(Denis), 리프(Riff)씨 등이 함께 했다. 

1970년대 초기 임대아파트는 당시만 해도 매우 좋은 집들이었다고. 마이클은 “침실이 1,2,3개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쓰지 않는 온돌이 돼서 빨래를 하면 5분 만에 말라서 신기해하고, 친구들이 목욕을 하러 놀러오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마이클씨는 6년전 도시재생 사업으로 지어진 방두개짜리 복층형 아파트로 이사했다.

마이클씨는 “중앙난방식으로 새로 지어진 집에 만족한다. 공원이나 놀이터가 주변에 있어 손자 손녀들도 좋아한다”며 “그러나 가스비가 예전에는 임대료에 포함되어 걱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따로 나와 고민”이라고 말했다. 15층 아파트에 살 때는 몰랐던 동네의 문제도 잘 보인다. 마약을 하는 청소년이나 기물을 파손하는 모습도 눈에 띄어 이웃들과 그런 고민을 나누게 된 것도 변화 중 하나다.

“지역재생공사가 주민들의 의견을 많이 듣기 위해 노력한 건 사실이다. 부엌을 어떻게 만들까를 묻기도하고, 커뮤니티를 고민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동네 90가구 중 절반 정도가 이주를 거부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지긋지긋한 이웃을 다시 만나기 싫다는 것부터 원하는 집으로 옮겨가지 못한다는 것까지. 그러다보니 계획과 달리 진행이 늦어졌다. 철거가 늦어지니 새 집 건설도 늦어졌다. 재생공사나 시가 그런 것을 왜 예측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빈집 불법 이주자였던 캐시씨
어떤 사업이나 도시개발도 100% 주민의견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발리문에서도 지역재생공사와 시, 주민들간의 갈등은 없지 않았다. 주민들은 지역재생공사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최종 결정에는 주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78년 델파스트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주민 캐시씨는 이주 과정의 사연을 소개했다. 캐시씨가 6살이었던 당시 캐시씨의 가족들은 집이 없었다. 발리문의 빈집 한 곳을 무단으로 점거한 캐시씨는 그곳에서 1년을 살았다. 결국 경찰이 와서 내쫓겼는데 당시는 불법 이주자들에게 발리문에서 새집을 한 채씩 주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어수선한 정국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캐시씨는 어렸지만 불법 이주자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겪었던 치욕을 가슴에 담고 있다고. 

캐시씨가 원래 살고 있던 곳은 시빅센터 뒤에 있었는데 철거가 되기 전에 극장, 학생 기숙사가 먼저 지어지고, 큰 건물이 먼저 하나씩 들어왔다. “처음 기본계획이 나올 때는 흥분되고 좋았다. 그런데 주민들에게 설명도 없이 일조권을 가리는 큰 건물들이 들어서자 우리는 화도 나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가서 놀던 놀이터도 허물어지고 했다.”


벽난로보고 딸이 “쓰레기통이냐”
지금은 3층 주택으로 이사했다. 새집이 좋지만 캐시씨는 이사 과정에서 다시한번 이주민의 아픔을 느꼈다. 이주가 늦어지자 개발을 하는 사람들이 헬멧을 쓰고 왔다 갔다하고, 이사를 종용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지역재생공사에 인권 문제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

평생 고층아파트에 살다가 단층 주택에 이사와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함도 있다. 거실의 벽난로를 보고 딸이 ‘쓰레기 버리는 곳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온돌을 어떻게 켜는지 몰라 밤새도록 난방을 켜놓고 씨름을 하기도 했다. 

물론 불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캐시씨는 이사하기 전 지역재생공사에서 9주 동안 새로 온 집에 대해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교육을 함께 받으며 새 이웃을 만나는 기회가 됐다. 교육에는 건축가, 경찰, 지역재생공사 관계자, 주민대표들이 와서 새 집의 이용 방법, 안전수칙까지 설명해주었다. 
22년을 발리문에 살았다는 드니스도 캐시씨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다. “잘 살고 있는데 나가라고, 철거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싫었다. 이주를 할 때 편지가 한장 왔다. ‘너는 어느 지역 어느 집으로 가게 됐다. 대기자 중에서 9번째’라고 적혀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두려웠다.” 드니스는 이사가기로 한 집에 문제가 있어 결국 4년 늦게 이사를 갔다. 아일랜드 지질이 밑에 돌이 부풀어오르는 현상이 있는데 드니스가 가기로 한집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8만명 중 2백명 커뮤니티 활동
발리문의 전체 8만여명 중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200명 정도라고. 드니스 등 이날 모인 주민들은 지역 리더로 객관적인 평가와 함께 자신들이 할 일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주민 커뮤니티를 담당한 브라이언씨에게 도시재생 사업이 초기부터 주민참여적으로 진행됐어야한다고 보는지를 물었다. “발리문 지역재생 프로젝트는 중앙정부가 자금을 대고, 시에서 땅을 제공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 마스터 플랜을 짤 때는 커뮤니티가 잘 됐다. 뉴스레터를 통한 소통도 원활했지만 중간에 사업이 지연되면서 지역재생공사와 커뮤니티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소통의 책임도 서로 떠넘겼다. 지역재생공사 안에 커뮤니티 활동가가 너무 없었다.”

브라이언은 초기 데이터만 가지고 집을 지어, 처음 가족 구성이 부부와 아이 둘이었는데 20년 후에는 아이가 22살이 된다는 걸 예측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건축가, 계획가들이 주도하면서 ‘눈에 띠게 아름다운 지역’을 만드는 곳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발리문은 저소득층의 획기적인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막대한 예산 투자와 아일랜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인 지역재생공사의 열정 덕분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15년이란 긴 시간동안 과정 중에 겪게 된 경제위기, 주민 반발로 인한 철거 지연, 지반변화에 따른 문제 등 어려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시와 지역재생공사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것처럼 ‘주민참여기반’에 따른 사업이 될 수 있도록 시와 지역재생공사는 끊임없는 의견수렴과 참여의 기회를 마련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전히 참여와 소통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이제 지역재생공사가 떠난 빈 자리는 주민 커뮤니티와 민관 거버너스 영역이 채워가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과 사회투자지원재단 협력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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