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다시 찾아야 할 고양시 문화유산 - 북한산성 유네스코 등재

▲ 고양시가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는 북한산성. 행정구역상 고양시에 속하는 부분은 성 내부 전체와 성벽의 절반 이상이다.

고양시가 ‘고양600년’을 맞이해 북한산 산영루의 옛 모습도 복원키로 한 것 외에 덕양구 북한동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고양시가 주체가 되어 북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네스코 등재할 만한 가치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리려면 까다로운 기준 통과가 필요하다. 우선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복합유산 모두 얼마나 인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는가가 증명되어야 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고양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북한산성과 등재절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산성 내부 면적 188만평 
북한산성의 총 길이는 12.7km이다. 내부면적은 여의도의 2배 이상인 6.2km²(약 188만평)에 달한다. 북한산의 백운봉·만경봉·용암봉·보현봉·문수봉·나월봉·증취봉·의상봉·원효봉 등을 연결해 쌓은 성이다. 이러한 규모의 북한산성에서 행정구역상 고양시에 속하는 부분은 성 내부 전체와 성벽의 절반이상이다. 
북한산성 성벽에는 주 출입시설로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로는 아문 8곳, 수문 2곳,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랑 143곳 등이 있었다. 북한산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 주둔 부대가 머무는 군영 3곳, 군량미를 보관하는 보관하는 창고 8곳, 승군이 주둔하던 승영사찰이 13곳, 군사지위소인 장대 3곳 등이 있었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면서 쌓았는데,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혹은 1/4만 쌓거나 아예 여장만 올린 곳도 있으며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벽의 내부에서 대포로 공격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인 포루를 설치하지 않은 점,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을 한 개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옮기던 문인 시구문이 있다는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성성만의 특징이다.


도성방어 위해 숙종 때 축성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숙종 때 축성된 산성으로 본다. 28개의 높은 봉우리로 이뤄진 북한산 일원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삼국의 각축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산성이 축조됐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수도가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해 산성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도성이 한양으로 옮겨짐에 따라 도성방어를 위해 북한산성의 축성이 지속적으로 거론됐다. 실제적인 축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조정이 안정된 시기인 숙종 37년(1711년)에 이뤄졌다. 숙종 37년 2월에 착수돼 같은 해 10월에 완공되기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축성됐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숙종 때 북산산성 축조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은 우의정 신완이었다. 소론계 재상이었던 그는 숙종 28년(1702년)에 북한산성 축성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역설하고 나서자 숙종은 이 문제를 조정에서 심층적으로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는 도성 방어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과 북한산성을 축조하자는 주장이 맞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논의는 약 10년간 이어졌다”고 밝혔다.

북한상성 축성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기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산성 내에 어가를 모실 행궁이 필요했다. 행궁은 북한산성 축성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숙종 37년 8월에 시작돼 그 이듬해인 숙종 38년(1712년) 5월에 이뤄졌다. 행궁의 규모는 내전과 외전이 각각 28칸의 규모였다. 이렇게 지어진 행궁에 행차한 왕은 숙종 외에는 영조가 유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36년 8월 20일과 영조 48년 4월에 행국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영조 이후 다른 왕의 행차가 없어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북한산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고종대이다. 서양의 침탈로 국방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도성 방어를 위한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한산성 수리문제가 또 다시 고종대에 대두되게 됐다. 고종 16년(1879년) 8월 홍수로 북한산성 행궁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이에 대한 수축이 논의됐던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고종 30년(1893년) 5월 18일 경리청에서 북한산성 행궁과 공해를 중수하고 보축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산성 행궁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1925년 을축 대홍수 때문이었다. 현재 북한산성의 모습은 성체는 비교적 잘 보존돼 있으며 산성 내에는 임금 행차 때 처소로 사용한 임시 궁궐인 행궁지 터가 있다. 시는 시비 1억5000만원과 국비 3억5000만원 등 모두 5억원을 들여 복원공사를 착수할 방침이다.


남한산성·한양도성과 등재 추진

북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기초조사와 복원사업이 이뤄져야 한다. 기초조사와 복원사업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문화재청에 잠정목록에 오르게 된다. 이후 유네스코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북한산성에 대한 조사작업을 펼쳐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가늠하게 된다. 역사 전문가들은 북한산성과 함께 남한산성과 한양도성이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산성과 한양도성은 이미 많이 복원된 상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에 어느 정도 진전이 됐다.

우선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북한산성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문화재청에 잠정목록에 오르게 된다. 이후 유네스코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북한산성에 대한 조사작업을 펼쳐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가늠하게 된다.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려면 먼저 해당 유산을 잠정목록(Tentative List)에 가급적 1년 전에 등재해야 한다. 잠정목록에 등재되어있지 않은 유산은 세계유산으로 신청 불가하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의한 대표적 걸작 ▷시대적·문화적 특성을 대표하는 건축 예술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문화적 전통의 한 단면을 입증할 수 있는 톡특함 ▷중요한 역사단계를 밝히는 양식의 건물이나 건축군 ▷하나 이상의 문화를 대표하며,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충격으로 손실을 볼 우려가 있는 곳 ▷특정한 사건이나 전통, 사상, 신앙, 예술작품과 관련이 있을 것 등의 기준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