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600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고양 가와지볍씨와 아시아 쌀농사의 조명’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밝혀 줄 ‘고양가와지볍씨’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4일  킨텍스 제2전시장 306호에서 열렸다. 고양가와지 볍씨는 지난 1994년 당시 일산신도시를 개발하면서 고양시 가와지마을에서 발굴된 볍씨로 5000년 전의 것으로 미국 베타연구소에서 확인돼 학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고양시 주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이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발제는 20년 전 가와지볍씨 발굴에 크게 기여한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는 ‘고양가와지볍씨의 발굴과 농경사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한 데 이어 충북문화재연구원 김정희 팀장, 원광대학교 안승모 교수, 세종대학교 최정필 교수가 발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위안쟈롱·장쥐쭝 등 중국 학자와 오바타 히로키 일본 학자도 참여했다. 지난 4월 말 고양600년 기념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과 고양 가와지볍씨의 재조명’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던 박태식 박사는 그사이 작고해 참석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지난 4월 열린 고양600년을 기념한 고양 가와지볍씨 재조명 학술 대회에 이어 오늘 한·중·일 3개국 학자들이 참가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함은 매우 의미 깊다”고 말했다. 이날 펼쳐진 학술대회에서 5시간  넘는 시간동안 발표된 내용을 정리해본다.

 

▲ 1991년 당시 일산3지역 문화재 발굴 모습. 고고학자와 자연과학자가 중심이 됐지만 일반 시민들도 동원돼 현장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삽으로 토탄층에 도달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한반도서 가장 오랜된 재배볍씨, 벼농사 진화자료 ” 

“한반도서 가장 오랜된 재배볍씨, 벼농사 진화자료 ” 

 

“한반도서 가장 오랜된 재배볍씨, 벼농사 진화자료 ” 
이융조 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신도시 건설에 따른 문화재 조사는 일산 신도시가 처음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인 1989년 여름 한국선사문화연구소(당시 소장 손보기)와 단국대 박물관(당시 관장 윤내현) 팀이 지표조사를 맡았지만 실제 지표조사를 착수한 것은 1991년 5월이었다. 손보기(2010년 작고)·이융조·윤내현·손병헌 등의 학자들이 이끄는 조사팀은 대화리 성저·대화4리·주엽리 새말 등 3개 지역에 집중 조사했다. 고고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이러한 현장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 삽으로 토탄층에 도달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일산 신도시 개발지역에서 검출된 볍씨의 대부분은 가와지 2지구의 가와지층 상부 검은색 아래쪽에서 검출됐다. 가와지 2지구에서 검출된 볍씨 300점 중 계측이 가능한 287점을 계측한 결과 길이 6.0~7.8mm이고, 너비는 2.1~3.5mm로 나타났다. 가와지 2지구 볍씨는 대부분 짧고 통통한 단립형(자포니카)에 속하고 있지만, 35점은 길고 가는 장립형(인디카)이었다.   

일반적으로 야생벼는 재배벼와 다른 점이 많다. 대표적으로 야생벼는 재배벼보다 낟알이 소지경(벼줄기에 볍씨가 달린 꼭지 부분)으로부터 잘 떨어지는 탈립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가와지 1·2지구 볍씨의 소지경을 전자주사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아주 거친 흔적’이 찾아졌다. ‘아주 거친 흔적’은 인위적인 노력이 가해진 흔적이다. 즉 가와지 1·2지구 볍씨는 재배벼라는 증거다.    

가와지 발굴 볍씨의 분석결과 나타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와지 볍씨는 한국의 벼농사가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다는 주장을 수정해 신석기부터라고 소급해 볼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 자리매김한다. 둘째, 가와지 볍씨는 사람이 목적을 갖고 수확한 재배벼의 특징을 지닌다. 셋째, 신석기 중기(대화리층)부터 청동기 시대(검은색 가와지층)까지 두 시기의 다량의 볍씨가 출토됨으로써, 가와지 볍씨는 우리나라 벼농사의 진화와 발달에 관한 해석폭을 넓힐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가와지 1지구, 2지구, 일산 3지역 1지구가 더 훼손되기 전에 고고학적인 발굴방법으로 조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재배볍씨인 가와지볍씨와 그에 관련된 자료들이 보관, 전시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야 한다.

 


▲ 김정희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규소체 분석해 오천년전 벼농사 규명”
김정희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규소체 분석해 오천년전 벼농사 규명”김정희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규소체 분석해 오천년전 벼농사 규명”김정희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벼농사의 연구 방법의 하나로 식물규소체 분석이 있다. 벼 속에 축적된 규소체를 분석함으로써 벼과 식물의 종과 속을 판별할 수 있다. 벼 속에 있는 규소체는 많은 양의 빛을 받게 해 광합성을 활성화시키고  곰팡이류에 대한 저항성을 높인다.

1991년 당시 조사단에서 발굴한 빗살무늬토기는 6000년 전부터 4000년 전 사이에 형성된 대화리층과 5000년 전부터 4000년 전 사이에 형성된 갈색 토탄층에서 출토됐다.  

대화리층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에서는 3개의 시료 중 2개의 시료에서 벼 규소체를 확인했다. 가와지 2지역의 민무늬토기에서는 부채꼴형과 직사각형을 한 검은색의 벼 규소체를 확인했다. 이렇게 토기 바탕 흙에서 확인된 벼 규소체는 재배벼 식물 규소체다. 따라서 우리나라 벼농사는 늦어도 5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결론적으로 일산 가와지유적에서 확인된 벼 규소체는 재배벼로 우리나라 벼농사가 늦어도 지금부터 5000년경부터는 서해안 지역에서 이뤄졌고, 신석기 후기에는 이미 남한강가 지역과 낙동강 유역에서도 이뤄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안승모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단면원형 점토대토기문화 유일 벼 자료”
안승모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단면원형 점토대토기문화 유일 벼 자료”안승모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단면원형 점토대토기문화 유일 벼 자료”안승모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가와지 2지구의 흑색토탄층에서 검출된 볍씨는 단면원형 점토대토기(그릇의 표면에 띠 모양의 흙을 덧붙여 무늬를 낸 토기)문화의 유일한 벼 자료다.

이는 유목적·이동적 성격으로 파악됐던 점토대토기문화의 형성단계에도 벼농사가 중요한 생업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청동기시대와 고대 벼 입형과는 다소 이질적인 신창동 벼 입형이 가와지 흑색토탄층의 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와지볍씨의 가늘고 긴 형태가 신창동 볍씨와 마찬가지로 불량한 기후나 재배조건에서 벼 낟알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데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지적해 봤다.

가와지 2지구 볍씨가 자포니카 재래종에 비해 장폭비가 크고 갸름한 형태가 많은 것은 신창동 볍씨처럼 미성숙벼나 쭉정이가 많이 포함돼서 나타난 현상일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와지 볍씨와 신창동 볍씨가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두 유적의 벼가  청동기시대 및 고대와는 다른 독특한 입형을 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가와지 볍씨를 남겼던 주민들의 생활유적이 주변 구릉에서 확인되고 또한 이곳에서 벼와 밭작물을 포함한 보다 신뢰성 높은 작물유체가 검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가와지볍씨는 고고학자와 자연과학자의 학제적 연구가 이뤄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의 고대,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입형, 그리고 유전자의 벼가 재배되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 최정필 세종대 명예교수
 “남중국으로부터 벼농사 전파 일반적 견해” 

 “남중국으로부터 벼농사 전파 일반적 견해” 

 

 “남중국으로부터 벼농사 전파 일반적 견해” 
최정필 세종대 명예교수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유입된 시기는 적어도 4000년 전 이상으로 생각된다. 초기 벼농사는 주로 서부와 남부의 해안과 강어귀에 위치했던 제한된 충적평야 일부에서 실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3000~2500년 전에는 점차 범위를 넓혀서 내륙지역으로 확산됐다. 또한 벼농사 방법도 진일보했다.

한반도 초기벼농사의 전개과정을 크게 2단계로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4000~3000년 전을 화전농경을 비롯한 원시 농경법에 따른 벼 유전자와 연관된 벼농사의 적응시기, 그리고 3000~2500년 전은 벼농사의 정착시기로 보고자 한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남중국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렇지만 전파 경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우선 화남설이 있다. 양자강 유역에서 발생한 벼농사는 바로 황해를 가로질러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도달했다는 설이다. 다음은 양자강 유역에서 발생한 벼농사가 산동반도를 거쳐 황해를 통해 한반도 서부에 도달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야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황하지역으로 북상한 벼농사는 산동반도의 해안을 따라 요령지역에 전파되고, 이어 발해만을 건너서 서북부에 벼농사가 유입됐다는 설이 있다.

 


▲ 위안쟈롱 중국 호남성고고연구소장
“1만6천년전 옥섬암 볍씨 재배벼로 진화”
위안쟈롱 후난성 문물고고연구소

“1만6천년전 옥섬암 볍씨 재배벼로 진화” 위안쟈롱 후난성 문물고고연구소

 

“1만6천년전 옥섬암 볍씨 재배벼로 진화” 위안쟈롱 후난성 문물고고연구소 중국 후난 옥섬암 유적지의 가장 큰 발견은 볍씨출토이다. 1993년 옥섬암유적 1차 발굴에서는 흑색을 띤 볍씨 2개가 출토됐고, 1995년 2차 발굴에서는 회백색 칼슘결반층에서 2개의 볍씨가 출토됐다. 2004년 중미 합작으로 진행된 3차 옥섬암유적발굴 도중에 쌀알이 하나 발견됐다.

옥섬암유적 볍씨의 최초 발견자인 장원쉬 선생은 볍씨표본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옥섬암유적 볍씨가 야생벼에서 재배초기로 진화되는 과정의 볍씨임을 추정했다. 옥섬암 유적 지층상부 샘플을 측정한 데이터는 지금부터 1만3800년 전~1만4600년 범위에 속한다고 보고 있으며, 지층하부의 연대는 지금부터 1만6400년 전~1만8000년대 범위 내에 있다고 측정되고 있다.

옥섬암유적 볍씨가 야생볍씨인지 재배볍씨인지 벼농사의 기원 연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생물분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현재까지도 옥섬암유적 볍씨가 재배벼라고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야생벼의 속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은, 옥섬암 유적지주변에 보통 야생벼가 분포해 있었으며 옥섬암에 살고 있었던 고대인들이 야생벼를 채집하고 재배하도록 발전시킬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옥섬암유적 볍씨는 야생벼에서 재배벼로 진화하는 최초의 고대볍씨 유형이고, 비록 재배벼종이라 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벼를 재배하는 행위의 첫 태동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결론도 내릴 수 있다.

 

▲ 장쥐쭝 중국농업과학기술대 교수
 “중국 남쪽은 벼,  북쪽은 조 경작”
장쥐쭝 중국과학기술대학 과학기술사

 “중국 남쪽은 벼,  북쪽은 조 경작”장쥐쭝 중국과학기술대학 과학기술사

 

 “중국 남쪽은 벼,  북쪽은 조 경작”장쥐쭝 중국과학기술대학 과학기술사 중국에서 벼와 조는 중국 초기의 농업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대표적 농작물이다. 중국 초기 농업발전의 변화과정을 준비시기·시작시기·확립시기·발전가속시기·안정적 발전시기 등 총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중국 남쪽에서는 벼를, 중국 북쪽에서는 조를 경작하며 농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 과정에서 벼와 조를 혼작하는 지역도 생겼다. 벼가 북으로 전파되고 밀이 전파되는 등 황하유역에 풍부한 작물이 조성되고 거기에 조와 기장, 그리고 콩과류가 더해져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작물농업이 주된 생업방식이 됐다.
또 남쪽의 장강유역에서는 벼농작이 발전함에 따라 채집 위주의 경제활동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화북지역에 비교적 안정적인 벼농사가 이뤄졌다.   

 
▲ 오바타 히로키 일본 구마모토대 교수
“기존 정설 수정, 한반도 통해 일본에 벼농사 전파”
오바타 히로키 구마모토대 교수
일본에 벼농사가 들어온 경로에 대한 오랜 정설은 중국에서부터 대만과 일본 남방의 섬들을 거쳐 일본 본토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정설이 수정됐다. 일본 벼농사는 중국에서부터 한반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들어왔다는 것이 새로운 정설로 대두됐다. 즉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벼의 기원지인 중국 장강 하류역에서 북상후 산동반도·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를 통과해 일본열도로 전파하는 경로가 가장 신뢰성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언제’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일본에 벼농사가 들어왔는지는 규명되지는 못했다. 벼 전파시기를 보는 입장은 대개 △4000년 전인 조몬시대(BC 13000년~BC 300년) 후기 초반 △3500년 전인 조몬시대 후기 후반 △2800년 전인 야요이시대 초기에 전파됐다는 3개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최소한 야요이시대(BC300년~AD300년) 초기인 2800년 전에는 일본에서도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3500년 전인 조몬시대 후기 후반에도 일본에서 벼농사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 후기 이후 벼뿐만 아니라 ‘대륙계 식물’인 수수·기장·조도 재배됐다. 피·팥·콩은 외래재배식물이 아니라 일본에서 재배된 식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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