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두동 ‘한 라바쉬’ 운영하는 한국으로 귀화 한 삼사미 레자씨

▲ 삼사미 레자 대표는 마두역 인근 베이커리에서 페르시아 전통 자연발효 빵인 ‘라바쉬’의 맛을 알리고 있다.

이란 사람 삼사미 레자(42세)씨는 취재기자만큼 유창한 한국어로 주변을 즐겁게 한다.

레자씨는 91년 4월에 혼자서 한국 땅을 찾았다고 한다. 레자씨는 이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외대 한국어과를 다녔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동대문 운동장에서 옷, 양말 등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레자씨는 이란 말을 가르쳐주며 한국말을 배웠던 한국외대에서 이정열씨를 만났는데, 그를 형으로 대했다. 레자씨는 “형 집에서 라면으로 야참을 먹으며 이란말과 한국말로 밤새도록 대화했다”며 “형이 이란에서 공부할 때도 가족처럼 지냈다. 지금까지 22년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레자씨는 다니던 교회의 지인을 통해서 한국인 아내를 만났다. 국제결혼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 정직함과 성실함에 이끌려 결혼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1993년 9월 3일에 결혼식을 했는데 3년 후 비슷한 날짜인 1996년 3월 9일에 첫 딸이 태어났다는 점이다.

레자씨는 2006년까지 한국을 오고가며 자동차 부품(기아·대우·현대의 엔진부품)을 수출하는 일과 옷을 판매하는 일을 병행했다.

레자씨는 2009년 10월에 한국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다시 2011년까지 이란을 왕래하며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며 번역과 통역을 했다. “이란에서는 한국사람, 자동차, 가전제품에 대한 인기가 좋다.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행운이자 축복으로 여긴다”고 하는 레자씨. 아내의 나라에서 살아가고픈 레자씨의 꿈은 2013년 7월 19일에 주민등록증을 받으면서 한국으로 귀화함으로써 이뤄졌다.

레자씨는 “장모님과 한국사람을 위해서 페르시아 전통발효 빵인 라바쉬를 만든다”며 “한국 올 때마다 이란에서 가져온 빵 50개를 선물하면 장모님이 무척 좋아해서 금세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란에서 8m나 되는 대형 오븐 기계를 들여와 2012년 11월에 지금의 자리인 마두역 인근에 ‘한 라바쉬’를 열고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란의 주식인 라바쉬는 콜레스테롤·오일·트랜스지방·슈거·방부제 등이 첨가되지 않는 담백한 빵이다. 오직 밀가루·호밀·소금·물로만 만들어서 자연발효해 매일 오븐에서 굽고, 각종 소스·고기·채소 등으로 싸서 샌드위치처럼 먹으면 한 끼 든든한 식사가 된다. 레자씨는 라바쉬 판매 수익금 일부를 고양시 다문화 대안학교인 누리다문화학교에 장학금으로 선뜻 냈다. 또한 남성 결혼이주민과 외국인 근로자로 구성된 UN글로벌FC 축구팀에서는 감독을 맡고 있다.

1935년까지 ‘페르시아’로 불렸던 이란은 올해 한국과의 수교 52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했다. 이란엔 한국드라마도 인기 있지만, 공기놀이·말 타기·비석치기 등의 놀이문화와 어른공경 문화가 우리와 비슷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 옛날 신라의 공주가 이란으로 시집을 가서 이러한 문화를 전파했다는 유래가 있다.

또한 1973년 오일쇼크 당시 이란에서만 우리나라에 석유공급을 했는데, 이에 대한 감사표시로 테헤란 시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란 수도명을 따서 서울에 ‘테헤란로’를 만들었다. 또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서울로’도 있고, ‘서울공원’도 있다. 공교롭게도 서울의 ‘테헤란로’와 이란의 ‘서울로’는 현재 자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편이다.

이란에서 온 레자씨가 만든 라바쉬는 특허출원(출원번호 10-2014-0001978) 중에 있다. 레자씨는 오직 마두동에서만 아내 이진아씨, 동서인 송유정 팀장, 조카인 이다빈씨와 함께 라비쉬를 만들어서 지난해 열린 서울시청 광장세계음식박람회와 오는 2월 16일까지 열리는 ‘청평 얼음꽃 송어축제’ 및 이태원 등에 공급하고 있다. 예쁜 아내, 5개 국어를 하는 딸(고3), 3개 국어를 하는 아들(초등4)에게 된장찌개를 맛깔나게 끓이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인 삼사미 레자씨는 “가족들과 한국에 살아서 행복하다”며 미소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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