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고양시는 우리 온생명과 매우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고양시는 비교적 최근 신도시 개발과 함께 급속히 성장한 도시다. 마치 온생명이 인류의 등장과 함께 인구의 증가와 생태적 파괴를 동시에 경험했듯이 고양시도 신도시 개발과 함께 인구의 증가와 생태적 파괴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양시는 온생명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온생명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양의제21에서 최근 환경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한 것은 우리가 우리 온생명을 살리자고 결의하여 선포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 시민들은 오늘 환경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하기 이전에도 고양시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쌓아왔다. 그 하나의 사례로서 최근 고봉산에 문봉서원을 복원하고 주변 생태계를 보존하자는 운동을 들 수 있다. 아마 고봉산 아래 송학정 활터 옆을 지나다니신 분은 그 옆에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진 묘소 하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추만 정지운(1509-1561) 선생의 묘소다.

지금부터 대략 450년 전인 1553년 우리나라 역대의 가장 큰 학자로 뽑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서울 서대문 밖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의 조카되는 사람이 천명도(天命圖)라고 하는 도면 하나를 보여주는데, 보니 우주와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 원리를 몇 가지 도형과 글자로 표현해 놓았는데, 과연 놀랠만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추궁해 본 결과 고양 땅에 살고 있는 처사 추만 정지운 선생이 만든 것이라는 것이었다.

퇴계 선생은 “내가 어떻게 이런 큰 학자가 계심을 알지 못했는가”하고 자책하면서 그 분을 바로 모셔 오라고 했다. 그러나 추만 선생은 자기같이 초야에 묻혀 학문이나 하는 사람이 높은 벼슬에 있는 어른을 만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인지 거듭거듭 초청을 거절했다. 결국 몇 달에 걸친 여러 차례의 초청 끝에 두 분은 만났고, 천명도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연구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한 결과 두 분이 합의한 새 천명도를 만들었다. 이 천명도는 후에 퇴계 학문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 안에는 성리학의 기본원리가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후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 후 이들에게서 배운 후학들은 퇴계가 가르치던 안동 땅에 도산서원을 세워 퇴계의 학문을 이어갔고, 또 한편 고양 땅에서는 문봉서원(文峯書院)[숙종 14년 (1688) 건립, 숙종 35년 (1709) 사액]을 세워 추만 선생을 비롯한 이른바 고양 팔현의 뜻을 이어나가려 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바른 삶의 길을 추구했으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현대과학의 도움이 없이도 우리가 온생명 안에서 위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해내고 이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애써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의 뿌리가 잘려나가자 당연한 결과로 생명의 뿌리마저 잘려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추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고봉산 자락까지 파헤치고 그 곳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못해 최근에 뜻 있는 몇몇 시민들은 우리 자신들의 성금을 모아서라도 추만 선생의 묘소 옆 송학정 활터를 매입하여 그 곳에 문봉서원을 복원하고, 생태적으로 소중한 주변 지역 일대에 역사·문화·생태학습 공원을 조성하여 일산이 자랑할만한 매우 훌륭한 전통문화를 보존·전수할 뿐 아니라 희귀 생태계를 보존하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벌이게 됐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경기에서 4강을 차지해 온국민이 기쁨을 맛보았다. 이제 우리는 환경 월드컵에서, 8강, 4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승을 하여 온 세계에 자랑할만한 고양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 월드컵의 승리는 그 누구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이기는 길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무거운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우리 온생명을 살려나가는 가장 가까운 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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