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 금정굴 희생자 유족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은 17일부터 한국전쟁 당시 고양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파악을 위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실태조사 첫 인터뷰 대상은 일산 덕이동에 살고 있는 김기성 씨(사진· 75세). 송포호미걸이보존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씨는 어린 시절 덕이리 할미마을에서 자랐으며 한국전쟁당시 아버지였던 김형렬(당시 35세)씨가 부역혐의로 희생당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실태조사는 다음달 18일까지 실시되며, 희생자 유족이나 목격자 등을 대상으로 조사원이 직접 방문해 증언을 듣는 형태로 진행된다.
문의 070-8223-2700.

아버님은 어떤 분이었나
전형적으로 농사만 짓던 농사꾼이었다. (금정굴 사건 당시)35살의 나이로 동네에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걸로 기억한다. 부지런하고 일도 열심히 해서 경제력이 높았으며 덕분에 마을에서 발언권도 꽤 높았었다. 특별한 직책은 맡고 있지 않았다.

전쟁당시 상황은 어땠나
당시 10살이었다. 어느 날부터 천둥소리가 자꾸 났던 걸로 기억한다. 어른들이 전쟁이 났다고, 포성소리라고 가르쳐 줬다. 어렸을 때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전혀 몰랐다. 며칠 지나고 나니 어떤 사람이 마을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했다. 이북노래를 가르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당시 인민군에 의해 이 일대가 점령당했던 것 같다.  

수복 후에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며칠 지나고 나니 아군이 들어온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열댓명의 어른들이 덕이동에서 일산까지 마중 나가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데 중간에 마을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는데 아버지와 칠촌아저씨 2분, 총 3분만 경찰서로 끌려갔었다. 아군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실제 군인이 아니라 경찰서 치안대나 태극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을어른들 중에 경찰 쪽과 연계된 사람이 있어 그분들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 같다.

잡혀간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이틀 뒤에 누군가 우리어머니에게 통보하기를 밥을 갖다 줘야 한다고 하더라. 하지만 집안사람들 모두 공포심에 경찰서에 가질 못하고 내가 대신 심부름을 갔다. 그렇게 두 번 가져다 줬는데 경찰관이 내일부터는 밥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때 형을 집행했던 것 같다.

금정굴 사건에 대해 기억나는 데로 말씀해 달라
금정굴 앞동네(당시 수동네)에 한춘호라는 한의원이 있었고 그 주변에 복숭아밭이 있었다. 외삼촌이 밭에 일을 나갔다가 목격했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 가는데 그 중 우리 아버지가 있었다고 들었다. 입고 있던 베적삼에 피가 묻어있었다고 했는데 고문을 심하게 당했던 것 같다. 당시 공포분위기가 심해서 쫓아가지는 못했는데 금정굴로 끌려가는 걸 본 뒤 몇 분 후에 총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때가 음력으로 8월 25일이어서 집에서는 아버지 제삿날로 여기고 있다.

사건 후에도 식구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것 같다.
며칠 뒤에 경찰서 치안대들이 큰 총을 메고 마을사람들을 모았다. 집에 있는 모든 살림도구를 마당에 펼쳐놓고 가져가게 했다. 외양간에 있는 소까지 전부 가져갔다. 식구들이 쓸 숟가락, 밥그릇, 약간의 쌀만 남겨놓고 싹 다 가져가 버렸다. 사람들이 주저주저하니깐 방공호에다 대고 총을 막 쏘더라. 무서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 식구를 다 죽이겠다고 위협해서 아침이면 목화밭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집에 돌아와서 잠만 자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마음속에 우울감과 열등의식이 자리잡았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고 따돌림을 당하다보니 마을에 머물기 싫어서 일찍 외지생활을 시작했다.

이제야 진실규명에 나선 이유는
민속예술을 하다 보니 시청과 문화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금정굴 사건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혼자서만 가슴앓이를 하고 살았다. 금정굴 유골발굴 당시에도 발굴비용을 지원했지만 이름은 거론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활동하는 단체에 혹시나 누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라도 공개석상에 나온 것은 그간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셨던 분들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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