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인 거친 흔적’...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재배한 증거

1회 가와지볍씨, 발굴에서 출토까지
2회 벼농사 기원, 청동기에서 신석기로
3회 3천년 여주 흔암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4회 1만5천년 청원 소로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5회 5천년 가와지볍씨, 지역문화브랜드를 향해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다

아직까지 국내 고고학계는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BC1천년 전쯤인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는 국제학계가 지난 1976년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에서 발굴된 BC1천년전의 탄화미를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의 ‘물질적인 증거’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국내 선사고고학계는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는 조·기장·수수 등 밭작물이 주로 재배됐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벼가 경작되기 시작했다고 봐왔다. 교과서를 포함한 각종 역사서서도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가와지볍씨의 발굴은 3000여 년 전 청동기시대의 여주 흔암리 유적 출토 볍씨를 훌쩍 뛰어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가와지볍씨 발굴 이전까지 학계에서는 흔암리 출토 볍씨를 근거로 벼농사의 기원을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일산 신도시 역사유적 조사단이 이뤄낸 가와지볍씨의 발굴은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5000년 전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다’ 이번호에서는 가와지볍씨가 왜 ‘재배벼’로 입증되는지, 그리고 한반도 벼농사와 관련해 재배벼로 입증된 가와지볍씨가 가지는 의미를 짚어본다.

312개 볍씨중 5천년전 것 12개

▲ 일산 2지역의 가와지 1지구에서 나온 12개의 볍씨 중 5개의 볍씨가 가와지볍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볍씨는 이융조 교수에 의해 5020년 전의 볍씨로 발표됐다.
1991년 일산신도시 문화유적 발굴은 1지역(현재의 대화동·옛지명은 대화4리 성저), 2지역(현재의 대화동·옛지명은 대화4리 가와지마을), 3지역(현재의 주엽동·옛지명은 주엽1리 새말), 4지역(성터·옛지명은 대화4리 성저)으로 나눠 전개됐다.

일산 1지역에서는 10점, 일산 2지역에서는 312점(가와지 1지구 12점, 가와지 2지구 300점), 일산 3지역 9점 등 총 331점의 볍씨가 발굴됐다.  
 
이중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가 발굴한 일산2지역 중 가와지 1지구에서 출토된 12점의 볍씨가 박힌 대화리층의 연대 측정 결과 4330BP(1950년 기준으로 4330년 전)으로 나타나 다른 지역에 비해 연대가 가장 오래된 지층으로 밝혀졌다. 연대측정은 미국의 저명한 베타연구소에서 실행했다. 일산 1지역에서 발굴된 볍씨의 토탄층의 연대는 4070BP, 일산2지역 중 1지구에서 발굴된 볍씨의 대화리층의 연대는 4330BP, 일산2지역 중 2지구에서 발견된 볍씨의 토탕층 연대는 2770BP, 일산 2지역에서 발굴된 볍씨의 토탄층 연대는 2600BP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융조 교수가 이융조 충북대 교수가 가장 오래된 일산2지역 중 가와지 1지구에서 출토된 12점을 MASCA이론에 따라 ‘다시 계산하기(re-calibration)’으로 계산한 결과 토탄층의 연대를 5020년으로 발표했다. 가와지볍씨가 5000년 전의 볍씨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태식 박사 연구로 재배벼 증명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5000년 가와지볍씨가 ‘재배벼’라는 사실이다. 이융조 교수는 “그런데 91년 10월 강릉대학교에서 열린 전국고고학대회에서 가와지볍씨를 무시하는 논문발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에 김포가 고향인 2학년생 김정희님(현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에게 졸업논문으로 가와지 볍씨를 연구하도록 권고했다. 농가출신인 김정희님은 흔쾌히 이 주제를 받아들여 일살 3지역 출토의 빗살무뉘토기와 갈대에서 그리고 가와지 겹일술토기에서 벼 규소체를 찾아내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대 허문회 교수도 조사발굴팀을 방문했다. 허 교수는 우리나라 벼육종학회의 대가로 당시 일산 1, 3지역 출토볍씨와 가와지볍씨의 연구를 통해 한국선사시대 농경문화 연구에 이바지했다.

 

▲ 고 허문회 교수(2010년 작고,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1991년 일산 문화유적 발굴 당시 일산 2지역의 가와지 1지구를 방문해 가와지볍씨에 관심을 보였다.


가와지볍씨가 재배벼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 고 박태식(1948~2013) 박사였다. 박태식 박사는 핀리핀대학에서 벼의 유전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 농촌진흥원 연구관으로 벼의 유전자연구를 담당해 많은 업적을 낸 인물이었다. 박태식 박사는 4000년 전 태국 ‘콕 파놈 디’ 유적 출토 볍씨연구에 대한 G.B 탐슨 박사 학위논문 방법대로 소지경 (벼줄기에 볍씨가 달린 꼭지 부분)상태에 따라 재배벼와 야생벼를 비교 검증하는 기준을 학계에 소개했다. 그렇게 하여 5000년전과 3000년전의 가와지볍씨 모두는 ‘재배벼’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선사농경의 연구에서 과학적으로 ‘재배벼’를 처음 증명해낸는 내 큰 업적을 학계에 제시했던 것이다.

 

소지경 매끄러운 야생벼와는 달라 
박태식 박사가 밝혀낸 것처럼, 가와지볍씨가 재배벼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가와지볍씨의 ‘소지경 상태’이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벼는 낟알이 소지경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잘 떨어지는 탈립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생벼의 소지경은 매우 매끄럽다. 이에 반해 재배벼는 소지경 상태가 매우 거칠다. 가와지볍씨의 소지경 상태를 전자주사현미경(SEM)으로 촬영한 결과 재배벼의 특성인 거친 단면이 나타났다.

이융조 교수는 “지난 1991년 고양시 가와지 지구에서 출토된 볍씨 중 일부 볍씨가 교란되지 않은 신석기 토탄층에서 발굴됐고, 따라서 한반도 벼농사 기원은 신석기시대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 소지경을 전자주사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아주 거친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수확한 재배벼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발혀졌다"고 부연했다.

가와지볍씨의 여러 분석 결과 나타난 특징들을 정리하면, 우선 당시까지 한국의 벼농사가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 주장에 신석기시대부터 소급해 볼 수 있는 고고학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신석기 중기부터 청동기시대까지 다량의 볍씨가 검출되어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과 전파에 관한 해석폭을 넓힐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

<이번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재단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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