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 발견된 가와지볍씨, 여주 흔암리볍씨보다 1천년 빨라

1회 가와지볍씨, 발굴에서 출토까지
2회 벼농사 기원, 청동기에서 신석기로
3회 3천년 여주 흔암리볍씨와 뭐가 다른가 
4회 1만5천년 청원 소로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5회 5천년 가와지볍씨, 지역문화브랜드를 향해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 기원을 밝히다

▲ 여주 흔암리 선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당시 선사인들의 주거지.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지역의 발굴조사 결과 토탄층에서 5000년전으로 추정되는 볍씨, 즉 가와지볍씨가 발굴되면서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벼농사는 3000년 전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고고학계의 일반적 정설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가와지볍씨가 처음 알려졌을 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부정적 반응을 얻기도 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는 긍정적 입장으로 변해 가는 추세다.

가와지볍씨가 발굴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쌀농사의 기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여주 흔암리볍씨다. 고양 가와지볍씨가 5000년 전 신석기 시대 볍씨인데 반해, 여주 흔암리볍씨는 3000년 전 청동기 시대의 볍씨다.
국제학계에서는 3000년 전의 것인 여주 흔암리볍씨(탄화미)를 한반도 쌀농사의 기원으로 인정해왔다. 여주 흔암리볍씨는 경기도 발굴 당시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산 2-1번지에서 발굴된 흔암리 선사유적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여주 흔암리볍씨로 인해 학계에서 우리나라에서 쌀농사를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였다고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B.C.1300~B.C.1000년경이다.

가와지볍씨가 훨씬 오래된 볍씨이고 재배벼라는 것이 입증됐지만 국내외 학계에 더 크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자체와 관련 전문가, 언론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 기원을 밝히다’ 이번 호에서는 가와지볍씨가 여주 흔암리볍씨에 비해 한반도 벼농사와 관련해 차별화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확도구와 발굴된 흔암리 탄화미
여주 흔암리볍씨(탄화미)가 발굴된 때는 1976년이다. 서울대박물관 고고학팀은 지난 1972년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펼쳤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500~600년의 탄화된 볍씨가 발굴됐다. 바로 여주 흔암리볍씨다. 또한 쌀 수확도구인 크기 14㎝ 가량의 반월형석도(청동기시대에 곡식의 낟알을 거두어들이는 데 쓰던 도구) 5개도 발굴했다.

▲ 1976년 서울대박물관 고고학팀이 발굴한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

▲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 중 장방형 12호 주거지에서 발굴된 무늬없는 토기 안에서 새까맣게 엉켜 있는 곡식 낟알이 발견됐다
당시 조사단은 흔암리 일대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14곳을 발굴했는데 가로 10m, 세로 4m의 장방형 12호 주거지에서 발굴된 무늬없는 토기 안에서 새까맣게 엉켜 있는 곡식 낟알을 발굴했다.

채취된 곡물은 서울대 농대 이춘녕 학장의 감정결과 쌀, 겉보리, 조 임이 판명됐고 이중에서 쌀의 품종은 크기가 작은(4.0×2.5㎜) 미발달 상태의 북방계 종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흔암리에서 발굴된 볍씨는 1920년 김해 패총에서 나온 기원전 100년 전 볍씨보다 500년 가량 앞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쌀로 인정받았었다. 여주 흔암리 볍씨를 발굴한 서울대팀은 “반월형석도와 함께 발굴된 한반도 최초의 수전(水田) 볍씨”라고 주장했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우리나라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에 저습지에서부터 시작됐고 초기철기시대 들어서야 관개시설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일반화됐다고 주장하는데, 이 내용이 아직 국사 교과서에 정설로 실려 있다.

한강권서 발굴된 김포 가현리볍씨
지난 1987년에는 김포 통진면 가현리에서 4000년 전의 볍씨가 출토됐다. 김포 가현리에서 발굴된 볍씨의 연대측정 결과 당시까지 가장 오래된 재배벼로 인정되던 여주 흔암리볍씨보다 1000년 전인 BC2100년경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김포 통진면 가현리에서 역사시대의 시작인 기원전 2100년 전경의 고환경을 알 수 있는 수 백 점의 옛 씨앗류를 포함, 3점의 볍씨가 출토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임효재 교수팀은 당시 통진면 가현리 554번지 일대의 배수로 공사를 위해 길이 약 200m, 폭 2m, 깊이 1m80㎝로 파헤쳐진 이탄층에서 채취한 자료를 50여 일간의 물채질로 분석한 결과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의 씨앗과 볍씨가 출토 됐다고 밝혀냈다.

당시 김포에서 출토된 3개의 볍씨는 길이 0.9㎝ 크기의 둥근형의 온대형으로 크기로 봐서, 기원전 1000년경의 여주 흔암리에서 출토된 볍씨(평균길이 0.7㎝) 보다는 발달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이때 볍씨와 함께 백제 초기의 격자문이 타날된 적갈색 토기, 회청색 경질 토기 등 40여 점의 토기와 수전 농사에 수로를 단단히 하기 위해 나무를 깍아서 만들어 사용한 말뚝 2개도 출토됐다.

당시 임효재 교수(당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한국선사고고학회장)는 “2000년 전경의 볍씨가 출토된 곳은 4000년 전 한반도에서 최초로 재배됐던 볍씨가 나왔던 이탄층에서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며 “통진면 가현리 일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벼농사의 발달 양성을 잘 보여 주는 중요 자료로 평가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강 유역에서 볍씨 다수 출토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포에서 볍씨가 발굴된 1987년 이후인 1991년 일산의 유적지에서 5000년전의 것으로 밝혀진 가와지볍씨까지  발굴됨으로써, 우리의 벼농사는 한강을 중심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활발했음을 뒷받침하게 됐다.

1991년 발굴된 가와지볍씨는 약 5000년 전의 재배 볍씨로 밝혀졌고, 2000년 발굴된 김포군 한강 하류 이탄층에서 발굴된 볍씨 역시 약 4000년 전 볍씨로 밝혀졌다. 한강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됐음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다.

김포 가현리에서 발굴된 볍씨가 3톨이었던 것에 비해 고양의 일산지역에서 발굴된 볍씨는 모두 300톨이 넘는다. 특히 일산2지역 2지구의 검은색 토탄층에서 무려 300톨이나 발굴됐다.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논농사의 도입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하나는 논농사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논농사가 이뤄졌다는 견해다.

이 사실은 쌀의 역사가 5000년의 긴 역사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서해안 지역일수록 오래된 쌀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쌀이 북방으로부터 전래된 작물이며, 더구나 이들이 모두 일본형(JAPONICA)의 ‘단립형 볍씨’였다는 사실은 한국이 쌀문화를 남쪽으로 전파시켜 일본에까지 전하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융조 교수는 “재배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볍씨들이 일산 1지역과 가와지, 김포 가현리에서 넓게 출토됐다. 이 사실은 한강을 배경으로 한 농경이 당시 발달됐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사회배경인  단군 ~고조선으로 연결하는 신용하 교수의 학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