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은 전부인과 사별하고 재취 부인으로 해남 윤씨를 맞았습니다. 윤씨는 시집와서 딸 하나(이승훈 부인)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약전·약종·약용이었습니다.

  천주교가 민간에서 크게 번지던 때에서 ‘사학(邪學)’이라는 비난에 휩싸인 천주교인들은 크게 탄압을 받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1801년 음력 1월 19일 정약종이 숨기려던 천주교 관계 자료와 신부나 교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한성부 포교들에게 압수당합니다. 그것을 빌미로 정약용 삼 형제는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국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약종은 천주교는 사교가 아닌 대공지정(大公至正)의 학문으로 자신은 결코 뜻을 바꿀 수 없다고 명백히 말했습니다. 임금과 아버지의 존재까지 부인했음을 시인하면서 죽여주라고 순교의 뜻만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당국의 의도는 정약종의 처벌에 있지 않고 약용을 죽일 자료와 증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캐보아도 약용을 죽일 증가와 자료는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약용을 석방해야 할 증거만 나왔습니다. “화란의 기색이 박두했으니 천주교 관계 일을 하라고 종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손수 칼을 잡겠다”는 약용의 편지가 나왔고, 약용이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겁을 주면, “정약용의 말은 모두 공갈이니 마음을 쓸 것이 없다”고 답한 편지도 나왔습니다. 더 명확한 자료의 하나는 정약종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형(약전)과 막내아우(약용)가 함께 천주교를 믿지 않음이 저의 죄입니다”는 구절까지 나와 약전·약용은 신자라는 죄명으로 죽일 수 없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국청의 국문 결과 동포형제 세 사람은 같은 길을 가지 못하고 일사이적(一死 二謫), 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귀양살이를 떠났습니다. 종교를 버렸다는 약전·약용의 처벌은 정치적 이유와 당쟁의 소용돌이 탓이었으나 약종은 신앙인으로 보면 순교했다고 여겨집니다.

 형제의 의리는 천륜이니 천륜에 위배됨 없이 형제가 뜻을 같이하여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아야 했건만 형과 아우가 뜻을 같이하지 못하고 서로를 욕하고 비난해야만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참담한 시절을 회고했던 것입니다.

 두 살 터울의 형과 아우가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던 역사의 비극, 형이 그렇게 옳고 바르다던 천주학을 아우는 그렇게 비난하고 욕했으니 왜 천륜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요. 형은 그렇게 신자들을 보호하고 감추었는데 아우는 신자들을 고발하고 비난했으니, 문명의 충돌이 가져온 아픔이자 비극이었습니다. 임금도, 아버지도, 조국과 민족도 부인했던 정약종의 시복, 논란이 있을 수도 있으나 종교를 위해 순교한 그 혼은 또 높이 사야 하리라 믿어집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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