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도층의 일탈이 도를 넘고 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뉴스들로 넘쳐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상황이 되었다. 또한 계층 간 불신이 극에 달해 어디를 보나 불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누가(어느 집단) 좀 잘 산다더라 하는 얘기가 돌면 그날부터 그 집단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다 결국 비난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집단에 대한 어떤 제재가 이어져도 누구하나 동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파업은 비난을 받는다. 언론은 가장 먼저 파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처우(물론 돈이다)를 받고 있는지 퍼뜨린다. 그 후에 그 파업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양심적인 일반인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 과장되게 보도한다. 그러면 어느새 파업 당사자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파업은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파업하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 이르고 외롭고 힘든 싸움을 이어가다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마치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것처럼 믿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연대의식이란 말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인생이 행복을 바라고 살기에는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도와가며 오손도순 함께 살아가는 건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꿈마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곧 공무원 연금개혁(개혁의 참 의미와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이 이루어질 거라고 한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데는 공무원들이 얼마나 많은 연금을 받으며 노후에 떵떵거리고 사는지를 말하는 언론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자기보다 잘 사는 공무원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되었다. 그런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는 마치 정의실현을 위한 양 연금에 손을 댄다고 하고 사람들은 다 찬성한다는 반응이다. 그 여파가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너만 누리는 것 그건 싫다는 못난 마음들뿐이다.

100세를 사는 세상에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이다. 가난한 채로 100살을 사는 것은 재앙이며 저주일 뿐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신의 미래와 안전한 남의 미래를 비교해보며 그저 미움만 키우는 것이다. 왜 우리는 같이 잘 사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누구도 그런 방법은 얘기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덕으로 다스리는 것과 법으로 다스리는 것의 차이를 말해왔다. 법으로 다스리면 그 형벌로 인해 죄를 피하기(짓지는)는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였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날카로운 칼이라도 밟을 수 있는 마음이 용기라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엔 그 용기가 없어진지 오래다.

다스리는 자들이 스스로 덕을 쌓고 그 덕으로 다스리면 온 세상이 감화하여 스스로 좋아진다 하였다. 우리는 얼마 전에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가진 적이 있었다. 통치 자금으로 쓸 수 있는 특별 교무금 6조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나라 살림에 쓰도록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분의 아름다운 행적은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았다. 언론이 썩은 탓이다.

지금 우리의 언론은 계층 간 갈등만 부추기고 가진 자들만 더 배를 불리는 판을 깔아주고 있다. 빠듯한 살림살이,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는 민초들끼리 서로 다독이며 가지는 못할망정 그 밥그릇 깨자고 달려들어서야 될 일인가. 자고 일어나면 흉흉한 얘기들이 세상을 더 지독하게 물들인다.

자기의 불행이 마치 잘 사는 이웃의 탓인 것처럼 분노의 화살을 쏘는 일을 멈추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때이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