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누리전에 출품한 이정원씨의 사진 10점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녀’의 일상 들여다보기
“올해가 가기 전, 엄마를 한 번 돌아봐주세요”

누구의 발일까? 강수진, 박지성, 손연재, 이상화…. 그들과 닮은 듯 다른 듯 닮은 발의 주인공은 이정원(42세·덕양구 행신동)씨의 ‘그녀’다.

‘그녀는 사십대에 혼자가 되었다. 육남매가 그녀의 어깨 위에 옹기종기 앉았다. 이토록 가엾고 무거운 새끼들을 이고지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키웠으니 뼈들은 휘어지고 발가락은 썩어가며 그 무게를 버텨냈겠지….’(이정원씨의 작업노트 중)

삶의 무게를 지탱해준 그녀의 이정원씨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사진중에 하나이다.

이정원씨가 ‘그녀’, 엄마의 발을 자세히 들여다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어디 발 뿐이었을까. 자잘한 샘플만 가득한 화장대, 립스틱을 면봉으로 바르는 습관, 일터에서 생긴 화상 자국, 40년 가까운 춤 실력…. 
이씨는 안쓰러우면서도 낯선 엄마의 모습을 10개의 액자에 담아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어울림미술관에서 열린 ‘미디어누리전_미술관 옆 사진관’에 출품했다. 이 전시는 고양영상미디어센터 사진촬영 강좌 수강생들의 수료작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삶에 데인 상처
“엄마의 생활 패턴을 잘 알고 있으니까 사진 찍기가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고향(전북 김제)에서 마주한 그녀는 이씨가 ‘다 안다’고 자신한 엄마가 아니었다.
처음 가본 엄마의 일터에선 그녀의 팔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카메라 앵글 속에 들어온 순간, 마음이 울컥해 잠시 촬영을 접어야 했다. 30년 넘게 식당일을 하면서 수없이 불에 데였을 텐데, 혹여라도 잘릴까봐 그녀는 주인에게 약값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지냈단다. 워낙 바지런해 식당일을 도맡아하다시피 하는 모습도 이씨에겐 안타까웠다. 마흔 넷에 혼자 돼 여섯 남매를 책임져온 그녀의 삶의 무게가 오롯이 느껴진 날이었다.
“한때는 ‘1억원만 주는 남자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시집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대요. 여섯 자식에게 각각 1000만 원씩 주고, 더 안 된 자식에게 좀 더 주려면 돈이 그 정도는 있어야겠다고 계산한 거죠(웃음).” 1억원을 손에 쥐어준 남자가 없었던 건지, 그녀는 지금도 혼자 산다.

미디어누리전에 ‘그녀’를 출품한 이정원씨.

그녀의 놀이터
40년 가까운 춤 실력을 가까이서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간 앓으셨어요.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춤을 추러 가시더라구요. 당시엔 이해도 안 되고 화가 나기도 했었죠. 제가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알겠더라구요. 그게 엄마의 탈출구였다는 걸….”
김제에서 ‘춤꾼’으로 꽤나 알려진 그녀의 춤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박자에 가볍게 몸을 맡긴 그녀는 더 이상 손주를 14명이나 둔 할머니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돈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말라’는 평소 당부대로, 그녀 역시 파트너에게 춤을 가르쳐주며 쌈짓돈을 챙긴다는 것도 이참에 알았다.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기 꺼려하던 그녀를 설득한 것도 ‘돈이 되는 작업’이라는 ‘뻥’을 쳐서였다.

엄마를 부탁해
이씨는 이번 작품을 위해 3주에 걸쳐 매주 2박3일씩 김제를 오갔다. 연락 없이 자정이 돼서야 김제에 도착한 첫 날, 그녀는 “쫓겨났냐?”며 반가움 대신 걱정으로 이씨를 맞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엄마와 오롯이 지내기 위해 고향에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도 이씨의 필요 때문에 엄마를 찾아간 셈이었다.

나들이에 나선 그녀를 담은 이정원씨의 작품. ‘나들이’는 이씨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사진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씨는 10개의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나들이’를 꼽았다. 창밖에 스쳐가는 가을 끝자락을 깊은 상념에 젖어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여동생이 전시장에 와서는 ‘사진만으로도 엄마의 삶이 다 읽힌다’고 하더라구요. 당신들의 삶을 보는 듯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신, 연세 지긋한 분들도 계시구요.” 전시기간이 짧은 까닭에 이번 전시엔 엄마가 참석하지 못했다. 그 핑계 삼아 이씨는 ‘모델료’를 챙겨 조만간 엄마에게 갈 생각이다. “살면서 힘들 때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러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소문을 낸 기분이에요. ‘우리 엄마는 강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여기 있어…’라고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각자의 엄마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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