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쫑긋 59회 - 전호근 교수 초청해 듣는 동양고전

매월 첫 금요일 오후 7시 사과나무 치과에서 열리는 인문학 모임 ‘귀가쫑긋’(회장 임영근)이 올해 첫 강사를 초청했다. 현재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호근 교수는 지난 9일 ‘논어’와 ‘사기’라는 동양고전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엮어갔다. 이날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사마천은 실패한 자들에 헌사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책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책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책을 일컫는다.
 
‘논어’는 250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이른바 ‘고전’이다. 논어는 공자가 지어낸 책이 아니라 그의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들이 공자가 한 말을 기억해내 엮은 책이다. 공자가 살던 당대에 엮인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제자들의 기억속에서 두 세대 동안을 견디다가 제자의 제자 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록됐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를 결코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논어의 내용은 무릎을 칠 만큼 재미난 이야기가 없다. 가슴 불타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없다. 논어의 첫 구절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보라. 

지금에 와서 보면 이 구절들은 전혀 깊은 의미를 숨기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논어에는 또 이런 구절도 나온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근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리곤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도대체 제자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공자가 살던 당시를 알아야 한다. 공자가 살던 당시에는 사람보다 말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던 시절이었다. “사람이 다쳤느냐”고 묻는 공자의 말은 당시에 통용되던 가치관을 뒤흔드는 자못 충격적인 말이었다. 말보다 사람을 더 중시한 공자의 이 말은 당시의 가치서열을 송두리째 뒤엎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이다.

고전이라고 칭송되는 ‘논어’는 사실 여러 번 도전을 받았다. 근대의 길목에서 논어는 봉건윤리의 대명사로 지목되더니, 급기야 지주계급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비판 받았다. 또 문화혁명 때는 공자를 반혁명분자라 비난했다.

‘논어’를 읽고 나서 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는 다 일리가 있는 말이며, 심지어 그 반대로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다만 읽지 않고서는 이들 커뮤니티에 낄 수가 없다. 이 시대에 ‘논어’가 멍청이의 헛소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삶의 양식이 될 것이냐는 모름지기 당신이 ‘논어’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있다.

이번에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기원전 99년에 한 무제의 명령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이릉이라는 장수가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릉의 처리를 위해 무제가 중신 회의를 열었는데 다른 신하들은 모두 능지처참을 할 것을 주장했는데 사마천만은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두둔했기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무제가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렸는데 사마천은 사형 대신 성기를 거세당하는 궁형을 받았다. 사형을 모면하고 치욕을 감수하며 역사서 ‘사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다.

사마천이 ‘백 세대가 지나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느끼면서까지 지어낸 ‘사기’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었다. 승자의 기록이기는커녕 오히려 실패한 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 가깝다. ‘사기’의 절반이 넘는 열전에서 굶어 죽은 자가 맨 앞에 있고 돈을 벌어 치부한 자가 맨 뒤에 물러서 있다. 진왕을 죽이려다 실패한 칼잡이 형가에 대한 평가는 결코 승자였던 유방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오직 현재의 권력에 모든 걸 바치는 자가 다수인 이 시대에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기약하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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