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지역신문협회 조선족자치주 방문

시장경제의 명암

"문제가 있으면 '시 인민정부' 시장에 묻지 말고 '시장경제'의 시장에게 물어봐라"
중국의 조선족 사회의 급변하는 시장경제체제로의 변화를 이 같은 농담으로 연변일보 사장 허용석 사장은 실감나게 설명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건너편, 우리 민족이 봉건 지주의 착취에 벗어나 신 개척지을 찾아 나서 정착한 땅. 그리고 무장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연변 지역은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으로 창립 50 돌을 맞았다. 자치주 주도인 연길시의 인구만 보더라도 44만명중 60%가 조선족이다. 연변자치주는 마치 한반도의 한 도를 찾아온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언어, 문화, 사회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시간을 조금 되돌려 놓은 듯 하지만 한민족의 생활 그대로였다. 추수철의 농촌 들판은 검게 탄 농부들이 삼삼 오오 줄을 지어 벼를 베고 있었고, 저녁 밥을 지으려는 듯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농가 한 켠에는 한우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도시 거리의 간판은 한글이 우선하며, 당이나 인민정부의 수장은 당연히 조선족이다.

현재 중국내 30개의 소수민족 자치주 중 연변자치주가 가장 앞자리에 있다. 중국이 개혁 개방 후 연변자치주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 식품, 제약, 물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한국공업단지에는 3,000명의 한국 기업인이 활동하고 있다. 명년에는 눈썰매장과 골프장도 개장해 관광 사업을 특화할 예정이다.

"지킬 것(원칙)을 지키면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연변자치주 심수옥 부시장은 말한다. 연변은 타 도시에 비해 공기가 맑다며 환경 친화적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산업이든 유치가 우선이 아니겠냐는 우리의 인식을 뒤집고 이미 굴뚝을 없애기 위한 환경투자도 시작했다. "한국 기업인들이 많은 투자를 했지만 충분한 마케팅 조사 없이 투자해서 실패한 사례가 많다"며 고급 기술력을 가진 실력이 있는 기업인이 진출한다면 시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유행한 것이 일주일이면 연변으로 옮겨온다"며 재고품이나 보따리 장사류의 '구식' 사업 가지고는 안 된다며 첨단 업종의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만큼 연변 조선족 사회는 어두운 그림자도 깊게 드리우고 있었다. "개방 후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며 연변일보 허사장은 시장경제로의 변화 후 조선족 사회는 심하게 진통을 겪고 있음을 우려한다. "전에는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재미있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돈에 맛이 들어 소비 향락에 물들고 인심이 박해지고 있다"며 조상의 개척지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이미 연변 조선족은 6만명 이상이 타 대도시나 한국 등 외국으로 떠났다. 농촌은 황폐화하고, 수많은 학교가 폐교되고 어린아이의 울름 소리를 듣지 못하는 6~70년대의 한국의 농촌이 분화되는 현상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객지로 나가 어렵게 벌어온 돈을 재생산하는데 투자하지 못하고 쉽게 써버려 중국인에게 다 빼앗기고 다시 출국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며 허사장은 못내 아쉬워 하고 있었다.

연변신문의 고뇌

"외적으론 상급 정부의 지원을 최대한 끌어오고, 내적으론 구조조정을 해야하는 것이 숙명이다."
연변일보 허 사장은 당기관지인 연변일보도 시장속에서 자립해야 할 처지에 있음을 토로하며, 인원 감축 등 구조조정을 해야할 시점에 있다는 뼈아픈 고백을 하고 있다.

연변일보는 한글판을 내는 중국내 17여개 신문 중 대표주자다. 한글 한문판을 동시에 내는 신문으로 600여명의 적지 않은 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시장 경제 도입 이전 같으면 정부의 보조로 살림을 꾸리기에는 걱정이 없었지만 이제는 예산의 1/5정도의 보조에 그쳐 신문사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 "예전에는 신문 잘 꾸미는데 정력을 쏟으면 되었는데 이제는 경영적 측면에 걱정이 많다"며 '발전보다도 생존이 문제다'며 현 연변일보의 위상을 절박하게 말했다.
"총식구 500여명 중 인쇄부문 100명, 편집부문 65명, 행정부문 5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퇴직자인데 이들의 생활도 신문사에서 책임져야 한다며, 편집부문 40명, 행정일꾼20명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전에 고생한 분들을 함께 포용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독자에게 재미있는 신문'을 만들어 시장에서 승부를 하고 싶지만 당을 홍보하고 요구도 들어야하는 이중의 과제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독자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조선족을 주 대상으로 하는 연변일보는 조선족이 타민족에 비해 문화수준이 높아 출생이 떨어지고, 한국 등지로 떠나 연변에서 조선족의 인구는 줄고 있어 시장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또한 변방이기에 광고시장도 넓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의 대변지로서 우리글과 우리말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속에 "시장 경제속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잘될 신심이 있다"는 허사장의 신념과 각오가 다소 위안이 되었다.
개방 초기에는 한국의 기관이나 자매 결연한 언론에서 큰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뜸하다며, 고유하게 남아있는 우리글과 우리말을 살리는데 한국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주고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신문 언론과는 다르게 연변조선족자치주 방송국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 공연 관람객과 출연진들이 시장 통을 방불케 했다. 공개 스튜디오에서 세련된 의상을 입은 신세대 가수는 백 댄서와 함께 화려한 동작의 춤으로 노래를 하고 꽉 메운 관객석은 열기가 드높다.
연변라디오티브이총국은 유일한 조선족 방송국이면서 소수민족 방송국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전체 직원이 1,000명 이상인데 국가가 방송매체를 중시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자체 광고수입도 날로 성장하고 있었다. TV는 3개 채널로 조선말과 중국어를 혼재하여 방송하고 있는데 종합 뉴우스, 경제 전문, 오락 프로그램으로 분할하고 있었다. 비리 폭로와 교화를 다루는 인기 프로 '추적조사'에서부터 경제전망, 청소년, 아동, 오락, 퀴즈 프로까지 현 한국의 프로그램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특히 연변조선족의 풍토와 민족적 자긍심을 불어일으키는 사연과 항일 활동 드라마 제작은 열악한 설비에도 불구하고 지역방송으로 최고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활력 넘치는 대도시 조선족촌

연변의 농촌과는 다르게 대도시 근방 조선족 마을은 활기가 넘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중국 4대 도시인 심양시내에 위치한 시 자치구 동릉구는 60만 인구중 20%정도가 조선족인 자치구다. 중국전체 성장률이 7%선인데 비해 동릉구는 25%대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다. "다른 구에서도 해외투자기업을 지원하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세금을 환불해주며 직접적 지원을 하고 있는 곳은 동릉구뿐"이라며 동릉구 박 주석은 자랑하고 있다.
"초기 투자자들은 보따리 장사수준으로 소규모적이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한국인들이 우쭐대고 유희나 즐기려 술집이나 찾아 중국인에게 밉게 보여 신용도가 떨어졌다"며 따끔한 충고도 덧붙였다. 또한 성공한 한국 투자자들은 자사가 잘되는 사업으로 홍보되는 것을 오히려 꺼려할 정도라며 중복투자로 인한 경쟁을 자제해줄 것과 '양국이 장점을 잘 살리면 아시아에서 크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박주석은 같은 민족으로서의 애정을 흠씬 느끼게 해주었다.
"사회를 건전하게 하려면 신문의 감독기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실보도가 아니거나 도덕성에 금이 간 기자는 망나니나 깡패와 같다"고 언론의 중요성과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언론인에 대한 충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가 찾은 동릉구의 조선인 집단촌 만융촌은 들어서면서부터 활기가 넘치고 있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대식 아파트가 마을 중심 가로을 따라 신축중이었다. 우리을 마중한 촌장이나 부녀회장의 표정은 마치 새마을 운동시절의 지도자나 맹렬 여성을 연상시켰다. 1,500가구 5,000명정도가 살고있는데 700명 정도가 한국내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기업인 성창기업과 양말제조 기업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고 국내 진출이 활발해 소득 수준이 평균소득이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공동체 문화를 잘 지키고 있다. 매년 운동회와 경노행사를 개최하고 예식장, 영빈관, 핼스클럽까지 자치 운영하고 있었다. 스스로 병원까지 설립, 최고의 의료진을 확보 외부에서도 멀리 이곳으로 진료받으러 올 정도다. 조선족의 미풍양속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민속촌을 설계, 터를 잡고 전시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대체로 농촌지역 조선족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 반면, 대도시 내 조선인촌 마융촌은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고 있어 만명이상으로 총설계를 다시 잡아 '촌'에서 '진'으로의 승격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다.
40만평의 공업단지와 5.000무(1무 약600평) 정도의 농업단지을 조성해 한국 기업의 유치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융촌은 절대 타민족을 들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민족의 자부심과 동반자

분명히 중국내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농촌은 분해되고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가 폐가가 속출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반면 도시는 인구대비 택시 수가 가장 많을 정도로 활기차 있다. 한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해 소득도 평균을 상회하고 있다.
수많은 조선족이 국내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불법체류자라는 족쇄에 묶여 숨죽이며 일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 사회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단지 시장의 신천지로 인식할지 모른다. 우월 의식에 사로잡혀 우쭐대고 추한 한국인의 인식을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주창하지만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 토지와 기간 산업이 국유화되어 있기에 자본주의보다 더 기민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키를 확고히 붙들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족 사회는 분명 미래 변혁의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조선족 지식인들과 당 관료들은 그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사회는 이제 그 얻음과 잃음을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양신문 발행인 윤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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