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우리부부 이야기> 아첼청소년오케스트라 지휘자 김도균·신지선 부부

첫눈에 반한 아내 미팅 방해하던 남편
학생신분이던 남편과 홀린 듯 결혼해
반주기계 개발에 빠진 남편 미워 가출도
3대째 음악가집안 일구는 비결은 ‘존중’

음악 안에서 서로 섬기고 존중하는 부부가 있다. 고양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아첼청소년오케스트라 김도균 지휘자(51세)와 신지선 사무국장(49세)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로 결혼 26주년을 맞는 이 부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학교 앞 카페 다 뒤져 미팅 방해한 남편
신지선씨의 작은 언니가 현악부 후배라며 김도균씨를 소개한 것이 35년 전의 일이다. 신씨가 중학교 3학년, 김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짧은 인사만 나눈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같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고교시절 기계공학도를 꿈꾸던 우등생, 김씨가 3학년 때 돌연 바이올린을 전공하겠다고 선언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갑작스런 결정으로 첫 입시에는 실패하고, 이듬해 한양대 관현악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신씨는 같은 해 한양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해 둘은 자연스레 캠퍼스 커플이 됐다.

“어느 날 장갑을 선물로 사와서 내 손에 끼워주며 ‘지선아, 이제 내가 너를 키울게’ 이러는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집에 가서 엄마한테 ‘엄마, 오빠가 나를 키운대, 진짜 웃겨.’ 그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두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사귀어볼 새도 없었다.

“한번은 미팅을 하고 있는데 도균씨가 떡하니 나타난 거예요. 얼마나 놀랐던지. 제가 미팅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앞 카페를 다 뒤지고 다녔다는 거예요. 그게 유일한 미팅이었어요.”

“그 한 번이 아니었죠.” 곁에서 듣고 있던 김씨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몇 번은 실제 미팅도 했고, 몇 번은 불발에 그친 시도를 했었겠죠.”

언제부터 반했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중3 때 처음 본 그 모습이 참 예뻐서 그 다음부터는 관리 들어갔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와 짜고 가출 시도
수많은 청춘남녀가 그렇듯 이들도 ‘밀당’(밀고당기는)의 시기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1988년 마지막 날 보신각종이 울릴 때 신씨는 집에서 잘못 넘어져 쇄골을 크게 다쳤다. 퉁퉁 붓고 아픈 와중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군대에 가있던 김씨가 떠올랐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도균씨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펑펑 나왔어요. 신기하게도 자고 났더니 쇄골 부은 것이 싹 가라앉은 거예요. 회개를 해서 그런가 봐요. 호호”

두 달 후 김씨가 제대를 하고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신씨는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를 했다(정작 사과 받은 사람은 그런 기억이 없단다). 어쨌거나 그날 불현듯 김씨는 청혼을 했고, 두 사람은 무엇에 홀린 듯 그해 5월에 결혼을 했다.

남편이 학생 신분이라 시댁에 들어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이 함께 살았다. 첫딸이 태어나자 시할머니는 아기 기저귀까지 손수 다려주면서 사랑을 쏟아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꿉놀이하듯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씨의 졸업연주회 때는 첫아이를 안고 객석에 앉아 남편의 연주를 들었다. 남편이 ‘샤콘느’를 연주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신씨의 표정에서 남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장학금을 받으며 음악도의 길을 걷던 김씨는 연주자들을 위한 반주기계인 ‘아첼’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오고 학교도 소홀히 했다. 신씨는 안되겠다 싶어서 시어머니와 짜고 가출했다.

“포항 언니 집에 있는데 하루 만에 이 사람이 6개월 된 아기를 메고 분유랑 기저귀를 싸들고 포항으로 찾아온 거예요.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2박3일 잘 놀고 올라왔죠.”
김씨는 이 사건을 결혼생활 최대의 사건으로 꼽았다. 

여권 뺏긴 채 중국에 억류, 사업 접고 음악에 전념
사람의 기억이란 참 재미난 것이다.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조금씩 다른 기억을 갖고, 중요하게 기억하는 것도 다르니 말이다. 아내의 ‘가출’을 기억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남편이 중국에 억류되었던 일을 최대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첼 기계를 개발해 1998년 특허를 받고, 벤처기업으로 등록 하고, 강남구를 통해 중국업체로부터 초청을 받아 3박4일 일정으로 10여 명의 연주팀과 함께 업체를 방문했다. 그쪽은 특허권을 사서 바로 계약하는 줄로 알고 있었고, 이쪽에서는 계약할 만한 회사인지 방문하는 정도로만 알고 갔다. 서로의 오해에 시작해 통역의 오류 등으로 특허권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당했고, 16박17일을 여권을 빼앗긴 채 머물게 됐다. 연주팀과 함께 먼저 풀려난 신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방송국을 쫓아다니며 탄원을 했다. 이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고, 당국에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중국 공안에서 풀어주라고 지시해 김씨 일행은 무사히 돌아오게 됐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아요. 거기 붙잡혀 있을 때는 기 싸움에 밀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는 술 다 받아먹고 기쓰고 버텼거든요. 그러다 한국 돌아오니 배짱이 생기더라구요. 게다가 투자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죠.”

김씨는 이 일을 계기로 사업은 적성이 아니라 판단하고 영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음악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김씨는 1999년 청소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실력 있는 아이들도, 초급단계인 아이들도 즐겁게 앙상블하며 음악을 즐겨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이라는 생각에서 악보를 쉽게 편곡하고 실력별로 파트를 나눠 연습시키고 모두 무대에 설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여름·겨울방학이면 100여 명의 아이들이 캠프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합주연습을 하고 매년 여름이면 고양어울림누리에서 공연을 갖는다. 김씨의 생각에 동의하는 음악지도자들이 늘어 전국 18개 지역교실이 생겨났다. 아첼청소년오케스트라 출신 학생들은 음악을 전공하기도 하지만 천문학, 경제학 등 다양한 전공을 택해 음악을 즐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김씨는 하이페츠 주법의 연주자로,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지휘자로 역량을 평가받아 아첼청소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고양현악합주단 상임지휘자, 고양국제고·안양예고 출강, 인(人)체임버 오케스트라 리더를 맡고 있다.

▲ 결혼 전 연예시절 사진.

딸까지 3대째 이어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집안
남편이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는 동안 신씨는 단원관리, 사무실운영, 연주회 기획 등의 일을 꼼꼼히 챙긴다. 김씨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사회성이 떨어지고, 불성실하고, 돈 개념이 없는 게 단점인데 아내는 이런 점을 보완해주었죠. 그런 면에서는 스승”이라며 아내에게 공을 돌렸다. 

이 부부의 두 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이올린을 전공해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장학금을 받아 부모의 부담을 덜어준 효녀들이다. 음악 속에서 자라나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전공을 결정한 딸들 덕분에 할아버지(김문성)-아버지(김도균)-딸(예슬, 예담)까지 3대 바이올리니스트의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음악가집안이 완성되기까지는 음악하는 남편을 믿고 묵묵히 뒷바라지해온 아내 김씨의 공이 크다. “남편이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남편을 이해하고 아낌없이 지원한 결과다. 그녀는 큰딸 예슬양의 졸업연주회에서 남편이 기타를 치고 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간이라도 남편이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고 하면 정성껏 샌드위치를 만들어내는 아내, 아내가 와인을 마시지는 않지만 항상 아내의 잔을 채워두는 남편. 섬김과 존중으로 쉽지않은 음악의 길을 걷는 이 부부를 보며 ‘섬김’의 바른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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