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부부 이야기 - 김기성, 최진순 부부

    

등산화수리전문 ‘슈마스터’의 김기성 대표의 설문동 집에 들어서면 멋지게 꾸민 정원과 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속으로 생각했다. 케이블 방송 ‘독한인생 서민갑부’에 소개도 되었다더니 역시 갑부인가 보다. 김기성씨를 만나고 또 한 번 놀랐다. 6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말총머리, 가죽 재킷까지. 두 팔 번쩍 들고 오토바이 좀 타시겠군 싶었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슬슬 이야기를 풀어내는 김기성(60)씨와 아내 최진순(61)씨.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런 고생을 한 부부가 또 있을까 싶다. 자, 이제 이 부부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담요 풍로 가방이 전 재산
‘여자한테 차이고 상처받아 헤매던’ 차에 지인의 소개를 받아 아내를 만났다는 김기성 대표(이런 이야기를 부인 앞에서 서슴지 않고 하다니 배짱 좋다). 아내 최진순씨는 “사귀겠다 뭐 이런 생각은 없었고 만나서 나이트클럽이나 가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만난 지 3개월 만에 같이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며 37년 전을 회고한다.
김 대표는 ‘있는 집 아들’이었지만 가세가 기울어 결혼할 당시에는 가진 것이라고는 담요 하나, 석유풍로 하나, 군 제대하고 가져온 더블백 하나가 전부였다.

최씨의 웃는 얼굴이 무척 예뻐서 함께 살고 싶었고, 그래서 막무가내로 전 재산(담요,풍로, 가방)을 들고 처갓집으로 쳐들어갔다. 일주일을 버틴 끝에 장인에게 허락을 받고 둘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때가 1979년의 일이다.

빈털터리 신혼부부를 위해 최씨의 어머니가 120만원을 빌려줬다. 그 돈으로 해수욕장 인근의 민박집을 빌려 여름장사를 해보겠다는 계획으로 둘은 만리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행운의 여신은 이 가난한 부부를 외면한 걸까. 태풍 베스가 서해안을 강타해 손님이 뚝 끊겼다.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해 장사는 망했다. 이 부부의 수중에는 70만원이 남았다.

“이 사람이 그 돈 70만원으로 충남 서산에 계시는 어머님께 땅을 사드려서 우리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어요.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자기 마음대로 그런 거예요. 그 사실도 나중에 알았어요.”

아내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서운하다. 그런데 이 남편. 당당하다.
“시골 땅이 경지정리하고 보니 집만 있고 밭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 밭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무라도 심어서 먹을 거 아니야. 부모 형제도 다 가족인데 먹고 살게는 해야지.”

자영업, 사업 연이은 실패
스포츠에 재주가 있던 남편은 80년 전주로 가서 롤러스케이트장을 열었다. 당시 ‘롤러부기’라는 영화가 흥행하면서 롤러스케이트 바람이 불 때였다. 전주종합운동장 옆 돌밭을 삽으로 골라 ‘롤러장’을 열었는데 대박이었다. 마침 전주체육대회가 열려 학생들이 종합운동장에 많이 오게 돼 전주시내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얼마 지나자 전주시내에 롤러장이 50개가 생겨나고 체육대회마저 끝나 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있는 돈을 털어 중앙쪽으로 진출하자 이번에는 롤러스케이트 붐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또 망했다.

사위가 뭘 하나 하면 열심히 한다는 것을 인정한 장인이 사업자금을 꿔줬다. 이번에는 방독마스크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농촌에서 농약사용으로 농부들이 죽기도 하던 때였다. 농부들이 농약 뿌릴 때 착용하는 방독마스크를 개발했다. 사출기까지 갖추고 실용신안을 받아 마스크를 제작해서 판매했다.



“농협에서 70만 개를 주문해온 거야. 대박이지. 납품날짜를 맞추려고 밤을 새워 방독마스크를 만들었어. 그런데 납품날짜 며칠 전에 다른 업체로 바꿨다고 통지가 온 거야. 70만 개가 고스란히 재고로 남은 거지. 눈앞이 캄캄했어.”

총판에 넘겼던 마스크 대금이라도 수금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다녔지만 돈을 회수하지 못했다. 남은 여력을 다해 커피필터를 개발했다. 당시 다방에서는 원두커피를 내릴 때 마치 한약을 달여 베보자기로 짜듯이 융천으로 짜서 썼다. 핸드드립커피 도구처럼 스테인리스로 망을 만들어 실용신안을 냈는데 다방에서는 기존에 쓰던 방식을 바꾸려들지 않았다. 설상가상 커피믹스가 뜨기 시작했다. 또 망했다.

오징어배 탔다가 차비 빌려 가족 품에
가족을 먹여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오징어잡이배까지 탔었다는 김기성 대표.
“배를 타고 속초에서 출발해 대마도 인근까지 갔다가 흑산도 앞바다에 갔는데 내 눈앞에 있는 시커먼 절벽이 마치 내 인생 같았어. 가족에게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목포에서 그냥 내렸어.”

김 대표가 탔던 배는 오징어도 안 잡혀서 돈도 못 벌고 목포에 내렸다. 탄현의 형집에 얹혀 살고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

“막막해서 공원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차비를 얻었어. 내가 당신에게 이 돈을 갚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다른 어려운 사람에게 꼭 갚겠다고 했지. 고맙게도 차비를 줘서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어.”

부부는 양계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벽돌공장에서 일도 하며 열심히 살았다. 앙고라 토끼털이 사업성이 있다고 해서 축사를 빌려 방을 들여 살면서 앙고라 토끼를 키우기도 했다. 한 쌍에 20만원 주고 분양을 받아 정성껏 돌봐 수백 마리로 늘렸다. 앙고라 토끼털을 팔면 돈이 좀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탄현 그쪽을 지나가면 옛날에 토끼풀 뜯으러 다니던 생각나고 눈물이 나려고 그래요.” 아내는 그 시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본인이 고생해서가 아니라 남편이 노력하던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런데 일이 또 안 풀렸다. 값싼 중국산 앙고라가 수입되기 시작했다. 85년쯤이었다.

“뭐 이렇게 되는 게 없는지 화가 나더라구. 명동에 나가서 토끼를 확 풀어버렸어.”
또 망했다.

“7전 8기? 우리는 10전 11기”
이 부부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스키나 장비를 이용한 스포츠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콘도가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에는 원동기 면허증만 있으면 수상스키도 탈 수 있었고, 레포츠 강사 자격증이 없던 시기다. 성장기에는 ‘있는 집 자손’이었던 김 대표는 만능스포츠맨이라 새로 들어온 레저스포츠도 금방 익힐 수 있었다. 레저스포츠 기획도 하고 제트스키, 패러글라이딩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하루 20만~30만원씩 강사비를 받았다. 돈도 좋지만 가족들이 현재를 즐겁게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김 대표는 주말이면 온가족을 데리고 강습이 있는 강과 산으로 갔다. 두 아들과 아내에게 각종 레포츠를 가르쳤다. 집이 부유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처럼 최신 레포츠를 즐겼다.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가족이 편하게 지내는 것이 최고”라는 김 대표의 신념에 따라 주말마다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다. 레포츠 관련 회사에 다니며 컨설팅도 하고 프로그램도 기획하며 가정생활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97년 IMF금융위기 때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었는데 현금자산을 털어보니 1200만원이 전부였어. 이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직장생활을 접고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발쪽을 눈여겨 보게 됐다. 대한민국 경제가 거품이 걷히고 갑자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지갑을 닫게 되고 있는 물건을 수리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등산화 수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초에는 매뉴얼을 만들어 신발 고치는 사람을 양성하는 아카데미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본이 부족해 직접 고치는 일을 하게 됐다. 상호는 IMF. ‘I’m Fighting’의 줄임말이란다. 아내는 아파트 알뜰장마다 가서 등산화를 수거해오고, 남편은 하루종일 고치며 사업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금융위기 그림자가 서서히 걷어졌다. 등산화를 수선하려는 사람들도 줄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축구화 수리로 시선을 돌려 조기축구회를 찾아가 신발을 받아왔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건다”는 생각으로 밤도 없이 일했다. 돈이 좀 벌렸다. 당시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시골에 조상님 유택부터 장만했다. 계속 사업이 잘 풀렸다. 2002년 처음으로 내집 장만을 계획하고 지금의 집터를 샀다. 전원주택단지만 조성되고 전기, 전화, 수도조차 없던 때에 집을 짓고 1호로 입주했다.

3년 안에 집과 차 사주겠다던 약속, 30년만에 지켜
슈마스터는 각종 등산화 브랜드와 계약을 맺고 수선을 한다. 신발수리공장이지만 제조공정에서 쓰는 기계를 들여와 마치 새 신발을 만들 듯 가죽을 바꾸고 다시 꿰매어 새것처럼 만들어준다. ‘오늘 들어온 물건은 내일 내보낸다’는 신념으로 늦도록 일을 해 대기업에서는 2주일 걸리는 것을 1.5일이면 납품한다. 이러니 사업이 번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기성 대표 혼자 천막에서 신발을 수리하던 사업이 이제는 건물도 갖추고 직원 7명의 어엿한 사업체로 성장했다. 각자 다른 진로를 택했던 두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김대표 부부는 이제 신발 수선은 하지 않고 집 옆에 파티하우스를 지어 동호회에 빌려주고 즐겁게 살아보려 한다. 인생 10전11기, 최선을 다한 삶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 

“아내에게 결혼하고 3년 안에 집도 사주고 차도 사준다고 약속했는데 30년이 걸렸어. 영이 하나 더 붙은 거지. 그래도 약속은 지켰잖아.”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었는데 후회는 없는지 아내에게 물었다.
“식구들끼리만 생각하면 항상 행복했어요. 나도 힘든데 시댁 식구들까지 거둬야하니 그게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떳떳하고 잘했다 싶어요. 당시에는 불만도 있었고 남편한테 퍼부은 날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럴 것도 없었는데 싶죠.”

가난한 신접살림, 할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까지. 맏이 노릇을 안했던 큰형 때문에 맏이 역할까지 해야했던 삶. 참으로 폭폭했던 삶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인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연인이었기에 이 부부는 환갑을 맞는 나이에도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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