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구 신평동 심재욱 한국분재연구원장

▲ 연구원의 200년 된 소사나무 앞에서 아내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는 심재욱 원장. 그는 “결혼 10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아내의 지극한 기도 덕분에 일본서 최고의 분재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재욱(74세) 원장은 1960년대 무렵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친구들과 모금운동을 펼치고 직접 벽돌로 건물을 지어 복지학원을 세웠다. 그곳에서 학교에 못 간 농촌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1인 1기 교육의 하나로 향나무, 밤나무 접목과 삽목 기술도 가르쳤는데, 그런 과정 중 분재의 예술성과 사업성을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분재를 배우기 위해서는 일본 유학을 해야 하던 시절이었는데, 결혼한 지 10개월 된 아내(서용남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개골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오른팔은 완전히 없어지고 왼팔도 절반 이상 손상을 입은 대형 교통사고였다.

그런 아내를 두고 일본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내는 가난한 농촌아이들에게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서라도 유학을 떠나라며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아픈 아내를 두고 일본의 유명한 분재촌인 오미야 분재원의 ‘등수원’이라는 분재원에 갔다.

그곳에서 심 원장이 “목숨 걸고 분재를 배우려고 한다”고 하자 “한국사람은 못 받아 준다”는 냉랭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일본까지 가서 의지를 꺾을 심 원장이 아니었다. 낮에는 빗자루 들고 분재촌 마당을 꼼꼼히 쓸고, 매섭게 추웠던 그해 1월 저녁에는 공원 벤치에서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노숙하면서 스물아홉 살의 해를 보냈다. 청소를 하면서도 그의 눈은 수많은 분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흐뭇했다. 다부지게 일할 힘도 생겼다.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분재원장은 “이런 한국사람은 처음 본다”며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승낙했다. 그 자리에서 유니폼을 입혀주고 별도의 방까지 제공했다. 심 원장은 “하늘을 날 듯이 기뻐” 더 열심히 일했다.

분재원장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증명하는 서류가 발견된 뒤부터는 분재원장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더 깍듯해졌다. 그 덕분에 그는 2년여 동안 분재 기술을 알차게 익힐 수 있었다.

이후 귀국해 일본을 왕래하며 다시 5년여 동안 스승에게서 기술을 배우고 일본 분재사범증도 취득했다. 그의 심성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 주변 사람들이 외국에서 좋은 조건으로 일할 것과 여인을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을 심심찮게 했다. 하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다친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해주는데 얄팍한 유혹에 흔들렸겠냐”며 아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줬다.

일본을 오가며 어렵게 배운 분재 기술은 1980년대 무렵 전국 각지에서 강의를 통해 보급했다. 최근에는 청송에서 열렸던 고양시 산림조합 산주·임업인 2박3일 연수에서도 교육했다. 홍성과 서울 수유리 국립 4·19묘역 인근 고급주택가의 정원수를 전정하는 작업도 맡아했다.

10여년째 정원관리를 하고 있다는 그는 “소나무를 전정할 때는 햇볕이 잘 들어가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해야 되며, 묵은 잎은 뽑아주고 솔잎은 2~3개만 남기고 잔가지 상태가 완전히 노출되도록 잘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원수를 분재처럼 키우는 방법도 보급한다”며 “그런 분재가 정원 안에서 하나의 작품처럼 돋보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한국분재연구원에는 희귀한 젖은행나무(60년), 산사나무(100년), 소사나무(200년)를 비롯해 60여 종의 귀한 분재들이 있다.

심재욱 원장은 “일산 호수공원의 소나무들이 제대로 관리가 안돼 안타깝다”며 “실력 있는 고양산림조합원들과 함께 노송 같은 자태가 되도록 가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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