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해 많은 통일운동가들이 여기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통일논의를 펴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고양이 떠오르고 있다. 고양은 개성과 거의 직선으로 통하는 통일로와 자유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보따리를 풀어보자.

일제는 이른바 메이지 유신 이후 군사력을 강화하고 민족적 숙원인 대륙진출을 도모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고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키고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동학농민군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청일전쟁을 벌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연달아 의병을 토벌하고 러일전쟁을 벌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이어서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을 장악한 뒤에 1910년 마침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일제는 만주로 진출해 또 다른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일전쟁을 도발해 동양을 석권하려 들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전하고 말았다. 조선은 35년 동안 질곡에 시달렸다. 미군은 일본에 상륙한 뒤 한반도 정책을 서둘렀다.

소련이 독일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하고 동방으로 눈길을 돌려 군사행동을 다시 벌였다. 맥아더사령부의 고위 장교들은 이에 대비해 38도선을 긋고 양쪽의 점령군이 각기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에서 올라가거나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맥아더는 이를 승인했으며 이를 트루먼 미국 대통령도 재가했다. 그리해 한국의 분단이 고착된 것이다.

다음에는 통일을 방해하는 강대국이 또 있다. 한국전쟁의 시기,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할 때 중국군이 개입해 통일을 저지했고 정전회담의 결과 38선이 아닌 군사 분계선을 그어 다시 분단선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보아 분단을 만들어내고 통일을 방해한 세력은 일본을 비롯해 미국, 소련, 중국 등 오늘날의 이른 바 강대국이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역량이 부족하고 통일의지가 강렬하지 못한 것도 역사적 책임이 주어질 것이다.

어쨌든 분단 이후 통일운동이 줄기차게 벌어졌고 남북공동성명과 6·15선언 등이 이뤄졌으나 강대국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달걀로 바위를 치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통일로와 자유로가 만들어졌고 개성공단으로 가는 기본 통로가 됐다. 이 두 길은 남북 간 작은 숨통의 구실을 하고 있다.

통일로는 왕조시대 전통적으로 남북이 통하는 기본 도로였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의 지원군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 침략군들이 이 길로 들어왔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남침 통로이기도 하였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우리 사신들이 오고 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자유로는 1990년대부터 단계적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개성~평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뤄져서 남북대화를 하는 대표 등 양쪽 인사들이 이용하여 왔다.
두 도로는 고양을 양쪽으로 감싸면서 북쪽으로 가는 직행도로가 됐으니 남북 교류와 통일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양시는 이 길을 소중하게 다루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험상궂게 쳐져 있는, 한강과 임진강가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군사 분계선에 길게 쳐져 있는 철책선도 걷어내야 하는 책무가 지어져 있다.

그러니 고양시민들과 파주시민들은 통일운동의 최전선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물론 두 시민들은 이곳 본고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 옮겨와 살더라도 이런 통일의 주요 지점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요구된다. 북한 주민이 우리와 한겨레라는 인식이 통일로 가는 무형의 기본 통로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고양시민들은 고양이 꽃 도시라거나 세계로 뻗어가는 도시라는 인식보다 통일을 선도하는 도시라는 인식이 요구된다. 먼저 시민 대상의 통일강좌를 열고 이어 한강과 임진강가의 철조망을 걷어 내고 군사 분계선을 뚫고 개성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어 내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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