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고양신문 창간 26주년 고구려 답사

고구려땅~백두산 탐방 26명 독자답사단 꾸려
천연요새에 산성 지은 고구려인 기술 감탄
광개토대왕릉 남의 땅에서 방치돼 안타까워
묵언수행하듯 계단 올라 만난 천지, “아!”
철저하게 동북공정 추진하는 중국과 비교돼
“우리 민족의 뿌리 다시 생각하는 계기돼”

올봄 4월쯤이던가, 윤주한 전 고양신문 발행인이 “올해가 광복 70주년인데 고양신문 독자들과 백두산 한번 다녀오면 좋겠다”는 제안이 구체화되며 답사단이 구성됐다. 일반적인 단체여행과 달리 고구려 유적지 탐방과 백두산 천지 등반으로 꽉 찬 일정, 여행사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가고 싶은 유적지와 하루 이동거리를 계산하며 일정을 조율하고 조율해 답사일정을 완성했다. 답사단 모집을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신청자 중 몇몇은 취소를 했다. ‘과연 갈 수 있겠느냐’는 우려 속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고구려땅을 밟아보겠다는 독자들 26명이 정예부대처럼 꾸려졌다. 올해가 고양신문 창간 26주년인데 공교롭게도 답사단 인원이 26명이다. 운명같았다.

26명 고구려 답사단은 부부도 있고, 모녀도, 부녀도 있었고 사회단체 리더, 순수한 독자 등 다양했다. 가장 젊은 송유라(25세)씨부터 최고령 유재덕(77세) 걷기연맹회장까지, 그러나 50년 나이 차이는 고구려 답사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무의미했다. 26명 모두의 목표는 하나.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고 백두산 천지를 보겠다는 것. 5일간의 답사 길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사람들처럼 의기투합해 즐겁고 기쁘게 이어졌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조성된 여순감옥
인천공항을 출발해 대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2층 전세번스는 4시간을 달려 단동의 여순감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했던 그 숭고한 정신을 떠올리며 숙연해졌다.

안중근 의사 처형장을 둘러보며 아들의 수의를 손수 짓고 편지를 보냈던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떠올라 목이 메었다. 최영숙 향교사무국장은 “우리는 과연 우리의 아들들에게 수의를 지어 입히며 당당히 죽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아픕니다”라며 울먹였다. 솔직히 자신 없다. 조마리아 여사의 결연한 의지와 눈물을 억누르며 아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쓰렸다. 이미 감옥으로서의 기능은 버렸지만 한여름인데도 서늘함과 음습함이 느껴지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절규와 피맺힌 한이 서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일제 관동주 법원 유적지를 방문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재판과정에서 히로부미의 죄를 15가지 꼽으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재판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형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의거 이유를 밝혔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마나베 재판장은 검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부당한 재판이었다. 망국의 국민은 공정한 재판조차 받을 수 없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의 기상이 오롯이 새겨진 광개토태왕비를 만나다
이른 아침을 먹고 환인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졸본부여의 왕녀 소서노가 함께 고구려를 일으킨 역사의 무대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피난성이었던 홀승골성(오녀산성)은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다. 해발 820m 높이에 만들어진 홀승골성은 200m 높이의 절벽을 활용해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에만 성벽을 쌓았다.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300m, 전체길이 8㎞에 달하는 천연의 요새다. 1996년부터 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 2000여 점이 발굴됐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라 부르는 샘이 있어 병사들이 오랫동안 산성을 지키며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가파른 계단을 밟고 올라 정상에 이르니 산꼭대기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발 아래로 비류수(지금의 훈강)가 굽이쳐 흐른다. 남아있는 성벽의 축성방식을 보니 영락없는 고구려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의 안내로 홀승골성을 온전히 둘러보는 코스로 하산하게 되었는데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계단 앞에서 일행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드려가며 내려왔다. 다 왔는가 싶더니 다시 허공에 매달린 난간과 다리, 이곳을 지나야만 내려갈 수 있단다. 수직으로 만들어진 철제계단과 허공에 매달린 계단 중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전진숙, 이미애씨는 서로 손을 잡아주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려왔다고 했다. 고구려 당시에는 이런 계단도, 다리도 없었을 테니 천연의 요새에 산성을 지었던 고구려인들의 안목과 기술에 감탄할 뿐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광개토태왕비와 왕릉을 만났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바로 그 광개토태왕비. 많은 이들이 ‘광개토대왕’이라고 하는데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적혀있으니 ‘광개토태왕’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안재성 회장은 일제에 의해 폄하된 호칭인 ‘광개토대왕’으로 교육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광개토태왕비는 1982년 중국 당국이 설치한 보호 비각 안에 모셔져 있지만 유리벽 속에서도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높이 6.39m. 총 1775자. 광개토태왕비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이 호방한 글씨로 아로새겨져 있다. 답사단 일행은 비문의 한 글자라도 더 읽고 마음에 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목을 빼며 애를 썼다.

광개토태왕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작은 동산인 듯 큰 돌무더기인듯한 것이 보였다. 광개토태왕릉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광개토태왕의 능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는 남의 나라 땅이 되어 복원도 관리도 할 수 없음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명의 장군총에 도착했다. 우리는 장군총이라 알고 있는데 현지 가이드는 장수왕릉으로 소개했다.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물증은 나오지 않았지만 평양으로 천도해 남하정책을 펼쳤던 장수왕이 평양에서 죽은 후 부왕의 곁에 묻히려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78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막강한 왕권을 휘둘렀던 장수왕이 요절했던 아버지를 기리며 그 곁에 묻히고자 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만일 장수왕의 무덤이 맞다면 평양에서 지안까지 길고 긴 여정의 장례행렬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 장엄한 광경을 상상하면서 대륙적 기질의 고구려 기상, 고대 국가의 막강한 왕권을 감히 짐작해본다.

압록강을 따라 강건너 북한땅을 바라보며 국내성터에 도착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북한땅, 어쩌면 산꼭대기까지 헐벗고 나무가 없는지. 녹음이 우거진 중국쪽과 대조적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국내성은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0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국내성은 압록강과 통구하, 두 갈래의 물길이 자연 해자역할을 하며 도성을 방어하는 구조다. 국내성 안쪽은 아파트와 집들이 가득한 마을로 변해있었다. 서울의 풍납토성과 비슷하다 여겨졌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고 수박 파는 상인의 노래같은 소리만 울려퍼졌다. 비스듬히 기대어진 자전거를 보며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백두산 천지를 품에 안다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향해 출발이다. 새벽 5시에 호텔을 출발해 한창 공사 중인 비포장길을 달려 백두산 서파 매표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1000m 정도.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해발 2100m 정도까지 올라갔다. S자로 구불거리는 도로의 양옆으로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가 어느새 키 큰 나무는 하나도 없는 초원이 나타났다. 버스 안에서는 쉴새없이 설명과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중국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창바이산’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얼마 지나자 ‘창바이산’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가 됐다. 나는 백두산을 오르는데 그들은 장백산을 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 나는 백두산을 오른다. 최영숙 향교 사무국장은 ‘정발산’이라고 들린다고 하여 함께 웃었다.

셔틀버스 종점에서 다시 1442개의 계단을 오르면 천지를 만날 수 있다. 백두산 천지는 백두산 올라가서 천지 못 본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쾌청하다가도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리기도 한단다. 가이드는 지금은 날씨가 좋지만 언제 조화를 부릴지 모르니 올라가는 길에는 사진도 찍지 말고 무조건 올라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아버지와 함께 온 송유라씨는 가장 먼저 천지를 보겠다며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신성희씨는 속도가 느리다고 남편 이후식씨에게 한소리 들었다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속도를 내고 있었다. 천지를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묵언수행하듯 계단을 올라 1442번째 계단에 올라서니 나무 데크 아래로 파아란 천지가 맑게 웃고 있었다.

‘아! 천지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저 건너편 장군봉과 북파를 바라보다 다시 천지를 바라보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에 담았다.

그대는 누가 뭐래도 백두산의 천지다.
단군할아버지 태어나시고 한민족이 시작된 영원불변의 성지다.

천지에서 애국가나 아리랑을 부르면 붙잡혀간다고 하여 우리 일행은 꾹꾹 참았다가 금강대협곡 숲에서 흥겹게 아리랑과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을 불렀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후련했다.

고구려 산성을 연나라 성이라 우기다니
고구려 산성 중 하나인 요양의 백암성으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진입이 허용될지 가봐야 안다고 했던 장소다. 도착해보니 발굴단은 철수했고, 흙먼지 날리는 마을 골목에는 집집마다 아이스크림 통을 내놓고 찬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쓰레기로 지저분한 골목길이 끝나고 백암성 입구에 도착했다. ‘연주성 산성’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중국 당국은 고구려의 산성이 분명함에도 연나라의 성이라며 ‘연주성’이라 이름붙여 놓았다.

성의 남쪽은 절벽을 이용한 천연의 자연 성벽이며 절벽 아래로는 태자하가 흐르는 천혜의 요지였다. 쌓은 지 1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건재한 모습에서 고구려인의 솜씨가 빛나보였다. 퇴물림방식으로 쌓은 성벽, 고구려의 축성방식의 대표적 특징인 치(雉) 등 고구려 양식이 분명한 이곳을 중국은 고구려의 유적이 아닌, 연나라 유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안재성 회장은 “지난번에 왔을 때에 비해 곳곳이 무너져 있다. 발굴한다더니 오히려 훼손시켰다”고 분개했다. 철저한 계획하에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에 비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하지 않는 우리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나를 알고 남을 알아야 백전백승, 내 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고 난 후에 진정한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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