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의 휴스턴 통신-‘미세스 하우저’>

“이봐요 젊은이! 난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여기서 쇼핑을 했지.”
미세스 하우저는 오늘도 은근히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고 한다. 미세스 하우저는 흰색 모자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최신형 캐딜락을 타고 매주 수요일만 되면 장을 보러 나온다. 물론 캐딜락도 흰색이다. 수요일은 시니어 데이(Senior Day)로 60세가 넘은 분들에겐 10% 할인을 하고 있어서 항상 노인 분들이 가득하다.

“미세스 하우저 ! 오늘도 역시 오셨군요?”
“그런데 어찌 내 이름은 아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의외였던지 입가에 잠시 미소가 보이는 듯 하더니 금새 평소대로의 굳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최고 오래된 단골 손님을 왜 모르겠습니까? 뭐 도와 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미세스 하우저는 내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눈치 채고 승리감으로 여유 있게, 마치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여기 이 포도씨 기름은 어디다 쓰는 건가?”

부인은 들고 있는 초록색 캔을 나에게 보여 준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고참으로서 체면 깍이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캔을 빼앗더니, “자네가 알 리가 없지” 하고는 뒤돌아 가 버린다.
멀리서 우리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직원 한사람이 고개를 설레설레 하더니 웃으며 사라진다. 미세스 하우저는 누가 이 상점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까다로운 고집을 받아주는 우리 직원들을 하인처럼 부릴 수 있고 새로 사장으로 들어온 동양친구에게도 다른 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줄 정도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심술쟁이 할머니는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수레 가득 물건을 싣고 나서 그제야 바깥의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는지 빨리 계산하라고 성화를 부린다.

“엘리나! 89불56센트입니다. 10% 경로우대 할인을 해서 80불61센트입니다.”미세스 하우저의 수선에 급히 계산을 마친 붙임성 좋은 케시어가 이름을 불러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봐 아가씨! 난 미세스 하우저요.”

놀란 케시어는 “죄송합니다. 미세스 하우저” 라고 호칭을 정정하며 돈을 건네 받는다.

“그런데 왜 당신은 거기 서 있누? 그러구 있지 말고 이거나 좀 담지 그래?”

뒷짐 지고 서서 지켜보는 내가 끝내 못마땅한지 물건을 종이 봉투에 담으라고 호통이다. 서비스업이라는 게 이런 손님을 다루는 재미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리아가 잔돈을 건네주는 손을 가로막으며 미세스 하우저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한다.

“리아 양! 아무래도 이 분은 경로우대 나이가 안되셨는데도 10% 할인 받으려고 수요일 날만 오시는 것 같아. 운전면허증을 확인하고 돈 계산을 다시 하세요.”

미세스 하우저의 목소리는 단번에 커진다.

“뭐라구? 팔십 먹은 노인네가 겨우 10%로 할인 받는 것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내가 당신보다 돈도 더 많을 걸?”

씩씩거리는 미세스 하우저를 달래서 장바구니를 대신 들고 문밖을 나서는 프론트메니저 뒤를 쫓아, 다시는 안 올 듯이 밖으로 나가던 미세스 하우저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나는 싱거운 결말에 서운해하는 다른 고객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이 드신 분에게 저렇게 한마디하면 효과가 있더라구요.”

다음 주 수요일에도 역시 장을 보러 나온 미세스 하우저는 남편을 끌고 들어 와서는 “여보, 이 친구가 여기 주인이야”라며 마치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친구를 소개하듯 나를 남편 하우저씨에게 소개했다. 막 서로 인사를 나누려는데 대뜸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유?”결국 그 한 마디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막 친구가 된 것을 들켜 버리고 말았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