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도서관 인문학 강의에 초대된 엄기호 사회학자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시대
멋지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공부 필요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희생은 불가피하다’라는 말에 동의하고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하며 타인의 고통에 침묵할 때 우리는 제 이웃을 뜯어먹으며 외면하는 괴물이 된다. 백성의 한쪽은 먹이로, 다른 한쪽은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위험과 안전으로 양극화하여 통치하는 국가다.”-  엄기호의 『단속사회』중

지난해 출간된 『단속사회』를 통해 동일성에 대해 끊임없이 과잉접속하고, 타자성에 대해서는 과잉 차단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갈파했던 엄기호 사회학자<사진>가 지난달 23일 화정도서관 ‘인문학을 권함’의 강사로 초빙됐다. 그는 ‘가르칠 수 없는 것, 배움의 기쁨’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펼쳤다. 이날 강의내용을 요약정리한다.

 

▲ 엄기호는 삶속에서 필연적으로 격게될 위험과 상처가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모든 것을 공부로 해결하려고 하는 공부중독에 빠져있다고 진단하며,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공부를 '삶의 도구'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은 대개 ‘학교 공부와 입시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억지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착각일 뿐이다. 아이들은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공부만 아니면 수업시간에 퍼져 자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고, 점심시간에 공짜로 밥을 주는 학교는 너무나 즐거운 공간이다.

 

공부중독에 빠져버린 시대
아이들의 이런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녀와 말이 안 통한다며 부모들은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 ‘자녀상담 비법’과 같은 공부를 한다. 요즘은 심지어 연애문제, 부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학교 선생님들도 각종 연수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공부를 한다.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나?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은 사실 삶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위험이 따르고 크고 작은 상처도 입기 마련이다. 그런 위험과 상처가 두려워 공부중독에 빠진 우리의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

 

▲ 엄기호는『닥쳐라, 세계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현상을 분석하고 짚어내어 출판사 관계자와 출판 전문가들로부터 '뉴파워라이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학교는 망했다
학교라는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삶 자체가 배움이었다. 그러나 학교가 생긴 이후 우리는 일정기간 학교에서 준비과정을 갖고, 졸업 후 삶의 시작이라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 모습은 어떤가? 한 반 35명의 아이들 중 5명만 공부하고 30명은 수업시간에 대놓고 자거나, 선생님 눈치를 보며 자거나, 본인이 자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실의 풍경이다.

온갖 학원으로 뺑뺑이 도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이제 더 이상 공부를 위한 공간도, 삶을 위해 공부를 하는 공간도 아니다. 학교는 망했다. 설혹 대학을 간들 뭐하나. 연세대 졸업식장에 걸려있던 ‘연대 나오면 뭐하나 백수인데’라는 플래카드가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멋지게 살기 위해 공부하자
원래 교육의 목적은 'excellence', 즉 탁월성의 추구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탁월함을 살려 멋진 삶을 살게 하자는 것.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것을 수월성으로 잘못 인식해 모든 아이들을 특목고나 SKY에 보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멋진 삶이란 무엇인가? 루이비통이나 샤넬 같은 명품을 쓰는 사람을 멋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무 옷이나 툭 걸쳐도 멋진 사람이 있다. 왜일까?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 때문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 이날 화정도서관 교양교실에서 열린‘인문학을 권함’강의에는 약 4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진정한 공부는 자유에 이르는 것
나만의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함을 배우며 나의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배우고 익히고 생각해 내가 가진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자유의 경지에 이르면 나만의 스타일을 갖게 된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 수학이 아니라 오히려 스포츠(체육) 교육이다. 육체활동을 통해 내 몸에 집중하면서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배우고 익히고 생각함으로써 자유에 이르는 공부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 매월 만나는 화정도서관 인문학 강의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장미선 주무관이 강의 종료 후 엄기호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부를 삶의 도구로 되돌리자
멋진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쓸모’다. 학습을 통해 배우는 것 못지않게 삶을 통해 배우는 모든 것이 다 쓸모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미감(美感)이 있어야 살면서 감탄하고 경이를 느낄 수 있다. 현대사회는 감탄이 사라져 버린 사회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음식 맛을 보는 미감(味感)이다. 쉴새 없이 SNS에 음식사진을 찍어 올리고 수많은 먹방 방송이 난무하는 이유다. 우리의 삶속에서 멋을 알고 느낄 수 있는 감탄과 경이를 각종 공부로 외주화 해버린 결과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어버려 점점 더 찌질해져 가는 세상. 이제 공부를 삶의 도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 엄기호 사회학자
엄기호 사회학자
‘답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묻고 또 묻는 것이 이번 생의 이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펴낸 책으로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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