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우리 부부이야기 김중앙식·오현주

이 세상의 모든 부부가 색다른 인연으로 만나지만 떡을 인연으로 만나 평생을 떡과 함께하는 부부가 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 장항동 오복떡집 김중앙식(51세), 오현주(47세)씨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 결혼에 골인한 김중앙식, 오현주 부부

떡집 딸과 떡 기술자의 만남
두 사람의 이야기는 19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봄, 김중앙식씨가 오현주씨 부모님이 운영하던 떡가게에 취직했다. 당시 대우건설이 리비아에서 송유관 공사를 수주해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현지에 떡기술자가 없었다. 김씨가 가기로 결정돼 비자가 나오기까지 3개월 동안 ‘놀면 뭐하냐’하는 마음으로 취업했던 곳이 오씨네 떡집이다. 오씨 부모님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다가 떡집을 인수해서 떡기술자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3개월간 떡기술을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취직했던 김씨와 부모님 일을 돕던 오씨가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스물다섯 살 총각과 스물한 살 처녀가 한 공간에서 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랑에 싹이 텄다. 
“지금도 귀엽게 생겼는데 그때는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잘 챙겨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냥 반해버린 거죠.”
남편 김씨는 농담인 듯 장난스럽게 아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다.

반지하 월세방이라도 좋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했지만 처갓집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던 둘은 그 길로 집을 나와 살림을 차렸다.
“곧 리비아로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가진 돈을 다 정리해 시골 부모님께 보내드려서 돈이 없었어요. 방이라도 얻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이미 소를 샀다고 하는 거예요. 소를 팔아서 내놓으라 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저기 돈을 융통해서 반지하 월세방을 얻었죠.”
수입이 보장된 리비아행을 포기하고 아내를 선택한 것이다.
3개월 후 아기가 생겼다. 아내는 이렇게 돈을 벌어서는 아이를 키우기 힘드니까 떡집을 차려보자고 제안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구해서 잠실아파트 상가에 떡집을 차렸다.
“2년 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1000만원을 모았어요. 당시 잠실 1단지 아파트 한 채 가격이 1800만원 하던 때니까 많이 벌었죠.”

지극정성으로 산바라지 해준 남편
첫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째 될 무렵, 주변 아주머니들이 몸이 이상하게 많이 부었다며 큰 병원을 가보라고 권했다.
“당시 다니던 산부인과에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는데 아주머니들이 하도 권하니까 강남의 유명한 산부인과에 갔어요. 임신중독증이 심하다고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면서 입원하라는 거예요.”
친정과 왕래하지 않던 때라 입원 동안 돌봐줄 사람도 없어서 입원을 못 하겠다고 했더니 담당의사가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지내는 조건으로 집에 보내줬다.
“남편이 너무 정성껏 저를 돌봐줬어요. 집에서 가게까지 두세 정거장 거리였는데 하루에 다섯 번을 오가면서 밥 차려주고 간식 챙겨주고 다 했어요.”
떡집은 새벽에 나가서 일해야 하는 특성상 늘 잠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남편은 내 아내와 아이는 내가 돌봐야한다는 마음으로 아내를 돌봤다.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죠. 부모님이 권하는 배우자랑 결혼했으면 부모님이 많이 챙겨줬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분만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남편이 같이 있으라고 해서 함께 진통을 했는데 그런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를 모셔다 몸조리 좀 해주라고 했는데 제가 7남매다 보니까 다른 집에서도 또 애를 낳은 거예요. 그래서 7일 만에 가버리셨어요.”
남편은 아내의 산후조리를 맡았다. 가게일을 하면서 매일 미역국을 끓이고 아기 빨래를 하며 산바라지를 했다.
“남편이 미역국 먹기 질릴까봐 쇠고기, 오징어, 홍합, 매일 다른 것을 넣어서 미역국을 끓여줬어요. 세탁기도 없었는데 그 한겨울에 찬물로 아기 빨래 다해주고 감동이었죠.”
아내는 임신중독증으로 어렵게 아기를 낳았지만 남편의 정성에 산후우울증도 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낳아 기른 첫딸이 어느새 26살이 됐다. 의사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부부는 정성으로 떡을 빚듯 삶을 함께 빚는다.
 

갑자기 주저앉은 남편
아기가 태어났다는 얘기에 친정부모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다가 부모님이 떡집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부부가 들어가서 살림도 하고 떡집도 운영했다. 2년 정도 함께 살면서 마음도 풀고 가족이 되었다. 장인의 떡집이 안정되어 부부는 다시 독립하게 됐다.
흑석동 시장에 떡집을 열자마자 갑자기 남편이 주저앉았다. 급성디스크가 온 것이다. 아내 오씨는 그동안 3남매 키우며 살림만 하고 있던 터라 떡만드는 기술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빚 얻어 시작한 가게를 그냥 닫을 수는 없어서 ‘내가 해보겠노라’ 선언을 했다. 남편이 쌀 빻는 것부터 모든 과정을 종이에 적어주면 그대로 만들었다. 그동안 남편은 걷지도 못하고 집에 누워서 있었다.
“한 달쯤 지나서 남편이 새벽 6시면 일어나 어디를 다녀오더니 일주일쯤 뒤에 가게에 나타났어요. 그동안 매일 새벽마다 뒷산을 울면서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렇게 둘이 같이 떡집을 하게 되었어요.”

떡의 변신은 무죄, 새로운 떡 개발하는 부부
의지가 굳고 성실한 부부는 부지런히 일해서 집도 사고 돈도 조금씩 모아갔다. 흑석동 시장에서 장사가 잘 되고 있었는데 시장을 재개발한다고 해서 일산시장으로 옮겨오게 됐다. 그때가 1997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일산장이 서북부의 중심 상권이라 장날이면 ‘사람들 머리만 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장사가 잘 되는 만큼 권리금도 비싸서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떡집을 시작했다. 성실하게 맛있는 떡을 만들었더니 손님이 꾸준히 늘어서 2002년에는 집도 장만하고 상가도 하나 사게 됐다.그러다 점차 재래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해 중대결심을 하고 장항동 현 위치로 옮겼다. 당시에는 MBC 사옥과 웨스턴돔 모두 공사 중이라 상권이 안정되기 전이고 젊은 사람들과 유동인구, 사무실이 많다는 상권의 특성도 예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떡의 변신이 필요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예쁘고 새로운 떡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한두 가지씩의 신제품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김씨는 스스로를 “떡 문화를 개선한 선구자 세대”라고 자부한다. 그는 떡 명장이며, 고양시 웰빙음식 축제 대상, 선인장축제 금상, 경기도 떡 명장대회 은상, 2012년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아내도 대회에서 입상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남편은 떡을 개발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아내는 딸기, 오미자 등을 활용해 색과 맛을 연구한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는 초콜릿떡, 빼빼로데이에는 빼빼로찹쌀떡, 복분자·흑미·백년초 등 천연재료를 사용한 이바지떡 등 새로운 떡들이 두 사람의 협력을 통해 개발됐다.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
혼자된 아버지에게 7년 동안 반찬을 보내드린 아내, 편찮으셔서 근처로 모셔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아버지를 지켜준 사람, 김중앙식씨는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친자식보다 더 내 부모에게 잘 해주는 것, 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지켜야할 기본적인 것들을 지켜준 것, 그런 모든 것에 아내에게 감사하죠.”
이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보폭으로 한발한발 나아가는 동지같아 보였다. 이 부부를 통해 부부란 함께 있어 든든하고 세상 누구보다 믿을 만한 동업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애시절 시댁인 전남 고흥군 근교 바닷가에서.


부부란,
 “내 것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어야 하고, 내 몸 네 몸이 아니라 우리 몸이다.”-김중앙식씨
“영원히 함께 가는 동반자이며 스승이다.”-오현주씨

이명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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