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는 완패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의 고통은 ‘정신적 상심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홍콩과 막대한 배상금을 영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후 청나라는 절치부심한다.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군대를 만들기 위해 서양의 선진 무기를 도입한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의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철갑선의 구축이었다.

참고로 당시 아시아에서 이런 규모의 철갑선을 보유한 나라는 없었다. 그보다 휠씬 작은 철갑함 1척을 일본이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히 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이었다. 그런 마당에 청나라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자신들이 최고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1894년이었다. 청나라로서의 끔찍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계기는 동학 농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조선이 일본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부터였다. 망국의 지름길이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로를 열어준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때, 일본의 조선 진출에 격분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청나라였다. 이른바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청나라가 자부하던 해군이었다. 아시아 최강의 북양함대를 이끌고 황해 압록강으로 들어서자 일본도 전쟁에 나선다. 하지만 청나라로서는 웃기는 싸움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7000톤급 철갑함 2대를 동원했으나 일본은 고작 4000톤급 철갑함 1대만 있을 뿐이었다. 누가 봐도 뻔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대패한다. 왜 그랬을까. 답은 청나라 군함의 대포에 있었다. 청나라는 호기롭게 포문을 열었다. 전쟁 시작과 동시에 승리를 자신하던 그때였다. 청나라 군함에서 날아간 포탄이 일본 군함에 떨어졌을 때 모두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큰 굉음과 함께 폭발해야할 포탄에서 튄 것은 어이없게도 콩과 진흙, 그리고 석탄 가루였던 것이다. 또 다른 포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고보니 폭탄이 아닌 ‘진흙 덩어리’였던 것. 내막은 이랬다. 당시 청나라 군대에서는 포 발사 훈련시 실전용 포탄 대신 진흙으로 빚은 연습용 포탄을 사용했다. 연습용 포탄은 콩과 진흙, 그리고 석탄 등을 섞어 포탄과 비슷하게 만든 것이었다. 문제는 방산 비리였다. 납품업자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실전용 포탄 역시 연습용 포탄을 납품했다. 그리고 이를 감독해야할 청나라 관리들은 납품 업자에게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 줬다. 결국 그날, 청나라 북양함대는 전멸한다.

하지만 100년 전의 청나라 일화는 오늘날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방산 비리 실태를  돌아 보면 더욱 그렇다. 41억 원 짜리 음파 탐지기가 작동하지 않아 ‘대한민국 최고의 구조함’이라는 통영함은 세월호 참사 때 출동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304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로 이어졌다. 물고기 잡는 어군 탐지기가 장착된 통영함은 역사상 최고의 구조함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방산 비리 대명사’로 남았다. 그래서 매년 국정 감사 때마다 이슈가 되는 방산비리를 근절하겠다며 정부는 약속하지만 이걸 또 믿을 국민은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6월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방산 비리를 두고 ‘생계형 비리’라고 표현했다. 여당 국회의원조차 분노케하는 실언이었다. 군 최고 수뇌부가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방산비리가 근절될 까닭이 없다. 청나라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방산 비리는 ‘생계형 범죄’일 수 없다.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방산비리는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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