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 오르비에토 “여유로운 삶 위해 불편함을 즐기자”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위태롭게 새워진 도시. 도시의 역사는 3000년 전 에트루리아인들을 기원으로 본다. 우뚝 솟은 바위산에 건물들과 성당이 하늘거린다. 멀리서 보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말 그대로 그림같다.

중세시대 건물들이 온전히 남아있는 도심으로 들어가면 작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골목에는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는 상점들과 인근에서 재배된 재료들만 쓰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도 새로운 풍경의 골목들을 계속 발견할 수 있다. 두 시간이면 큰 골목을 따라 도시 끝까지 횡단할 수 있는 정도의 소도시라 그런지 역설적으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은 더욱 느리다. 거리의 사람들이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는 듯 유유자적이다.

주민 5000명의 작은 중세도시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숙박을 한다.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 오르비에토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슬로시티의 발상지 오르비에토

1999년 가을날의 오르비에토,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 4곳(주그레베 인 키안티, 브라, 포지타노, 오르비에토)의 시장들이 모였다.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빠름’에 대항하고 소도시의 개성과 여유로운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네 도시의 대표자들은 치타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city) 운동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오르비에토 시에 슬로시티 연합, 국제연맹 본부가 자리잡고 느림을 상징하는 달팽이 로고 깃발이 걸렸다.

그로부터 16년 후 2015년 초가을 오르비에토, 지구 반대편 한국의 소도시 4곳(고양, 태안, 청양, 통영)에서 찾아온 기자들이 두오모(대성당)를 지나 500년 된 오르비에토 시청 골목길을 걸었다. 

현대 한국사회 특유의 “빨리빨리”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이들은 오르비에토에 앞서 로마를 방문했으면서도, 인구 2만 소도시의 역사에 새삼 감탄을 쏟아냈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은 물론, 3,000년 전 에트루리아 시대의 흔적마저 유지하고 있기 때문.

오르비에토 거리.

역사도시 오르비에토,
로마제국 이전 시대 유적부터 2차대전 흔적까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州)의 오르비에토(Orvieto)시는 로마와 피렌체 중간, 로마 북쪽 약 120㎞에 위치한 농업도시이자 관광도시다.

‘옛 오르비에토’는 기원전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로마제국, 중세, 심지어 2차대전의 흔적까지 남은 해발 200m 구릉지 위에 5천여명 시민들이 거주하며, 구릉지를 중심으로 시 외곽에는 1만6,000여명이 살고 있다.
로마에서 기차로 한시간을 달려 오르비에토 역에 내리면 자연이 깎아놓은 천연 요새같은 모습의 옛 오르비에토가 한 눈에 보인다. 구름이 낮게 깔리는 날이면 마치 하늘에 둥실 떠있는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탈리아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의 도시로 손꼽힌다.

역에서 순환 궤도차량 ‘푸니콜라레(Funicolare)’를 타고 올라가면 아래로는 이탈리아 중부의 포도농장들과 와인 리조트의 평화로운 모습을, 위로는 900년 된 오르비에토의 고색창연한 성벽을 볼 수 있다.

궤도차에서 내려 카헨 광장(Fiazza Cahen)에 내리면 오르비에토 입구에서부터 독특한 유적을 접하게 된다.
16세기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지시해 팠다는 깊이 62m의 ‘성 파트리치오의 우물(Pozzo di San Patrizio)’이다. 5세기 아일랜드의 가톨릭 성인 ‘성 패트릭’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땅 깊은 곳의 연옥을 보게 했다 하며, 오르비에토의 이 우물은 마치 연옥처럼 깊다 하여 성 패트릭의 이름이 붙었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도시 규모에 비해 성당의 크기는 상당하다.

이처럼 오르비에토는 그 역사의 중심에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이 있다. 소도시임에도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대성당(두오모, Duomo)를 보유한 곳이 오르비에토인데, 1263년 오르비에토에 거주하던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볼세나의 기적’을 보고받고 대성당 건축을 명해 1370년경 오르비에토 두오모가 완공됐다.

두오모는 13세기 성체포(聖體布)가 보관되어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는 곳인 동시에, 이탈리아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유럽 건축사에서 가치가 높다.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루카 시뇨렐리 등 15세기 거장들이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그린 연작으로 “영혼을 울리는, 압도적인 시각 체험”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다.

한편 구 오르비에토 지하는 3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1,200여개의 인공동굴들이 미로처럼 뻗어 있으며 ‘오르비에토 언더시티’라 불린다. 별도의 투어가이드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며, 붕괴 방지를 위한 점검은 물론 지금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동굴의 작은 구멍들은 비둘기집이다. 과거엔 식용으로 비둘기를 키웠다. 그 문화가 남아있어서인지 이곳에선 아직까지도 비둘기 요리를 하는 식당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에트루리아인들이 주거용으로 파놓은 동굴은 이후 중세시대에 올리브유 작업장, 마굿간, 창고, 물탱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20세기 세계 2차대전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도 되었다.

특이한 부분은 동굴 벽에 작고 네모난 구멍들이 줄줄이 파여 있는 모습인데, ‘콜룸바리오(columbario)’ 즉 비둘기구멍이다. 통신용 전서구를 키웠겠지 싶었지만, 오르비에토 시티투어 관계자는 “옛 사람들은 비상시에 대비해 동굴에서 식용 비둘기를 키웠다”고 설명했다.
 
오르비에토에 있는 것과 없는 것

비둘기 요리는 600년 전 중세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날 21세기 오르비에토를 찾는 관광객도 맛볼 수 있다. 다만 동굴이 아니라 리스토란테(Ristorante, 레스토랑)에서 정성껏 요리한 비둘기를, 지역 특산 와인을 곁들여서다.

물론 비둘기 요리보다는 소고기, 양고기 요리가 더 자주 식탁에 오르는데,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 등 천연재료만으로 맛을 내는 것이 오르비에토 사람들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다.

오르비에토에서는 화학조미료와 햄버거로 대표되는 ‘인스턴트’를 접할 수 없다. 심지어 미국식 커피 ‘아메리카노’ 조차 접할 수 없는 곳이다. 골목에 틈틈이 자리잡은 젤라토(아이스크림) 가게도 모두 천연재료 홈메이드를 자랑한다.

오르비에토의 ‘인스턴트’ 거부는 슬로시티 운동이 맥도날드 등 미국산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생활방식에 반발, 소도시 지역색과 유무형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 굴뚝이 상징하는 반 환경적 산업이 없이도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속가능한 지역경제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슬로라이프를 위한 오르비에토 시의 노력

오르비에토 시내에서 보기 드문 것 하나는 승용차이며, 들을 수 없는 것은 경적 소리다.

도심의 차랑 통행이 제한되는 대신, 궤도 열차를 타고 진입할 수 있으며 도심 안에서는 전기버스로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친환경적인 교통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도심 외곽 주차장, 지하주차장과 도심부 연계 무빙워크 도입 등으로 슬로시티의 시작을 알렸다.

자동차가 드물다는 것과 함께, 어느 골목을 걸어도 중세도시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엄격한 간판규제로 병원이나 약국 등 필수 시설의 간판을 제외하고는 네온사인을 사용할 수 없으며, 이를 통해 도시의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르비에토 성곽에서 바라본 풍경

교통과 도시경관 뿐 아니라 오르비에토 시 당국은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 △친환경 수소에너지 활용 △도자기로 대표되는 전통공예 육성 △도심 광장을 활용한 주2회 재래시장 △지역 유기농 농산물(로컬푸드) 보급 활성화 등 시민들의 슬로라이프를 위한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처럼 연 200만의 관광객을 맞이하면서도 중세 유적을 보존하고 쾌적한 환경과 주민들의 여유로운 삶을 유지하는 것은 ‘슬로시티’의 기획이 성공적으로 도시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에서 유래한 패스트푸드 문화에 반발한 ‘슬로시티 오르비에토’를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들이 미국인들, 그리고 500년 건물 호텔에 며칠씩 머무르며 느긋하게 오르비에토의 역사와 문화를 즐기는 관광객 반수가 미국인들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마지막으로, 오르비에토 여행자를 위한 주의사항. 오후에 “화창한 대낮인데도 왜 공예품 가게가 문을 다 닫았나” 또는 “저녁인데 식당이 문을 안 열었다”라고 놀랄 수 있다.

주민들의 여유로운 삶을 위해 오후 1시~4시 사이에는 낮잠 시간, 6시~8시 사이는 저녁 산책시간이므로 오르비에토 맛집 기행은 저녁 8시부터가 좋다.

<글=통영신문 정용재 기자 / 사진=고양신문 이성오 기자>

 



<인터뷰>오르비에토 시의회 로베르타 토티노·비욜리 알렉산드로 의원

 “1주일 이상 숙박하며 슬로관광 즐겨”

오르비에토가 슬로시티를 추진하게 된 배경은,

오르비에토는 슬로시티를 1999년에 선언 했지만 실은 1980년대부터 구도시를 중심으로 이를 보전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195m 고산지대에 위치한 오르비에토의 지반은 무른 화산암인데다 고대 에트루리아 이래 식품보관 등을 위해 집집마다 판 지하굴이 1200여 개에 달한다. 동굴이 많아 자동차의 도심 출입으로 지반이 약화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 지속되자 자동차 출입을 줄이자는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정부의 재원 지원을 받아 허물어져가는 동쪽 성벽을 보수하고 차의 출입을 막기 위해 공용 주차장 등을 만들었다. 더불어 아이들의 간식은 우리가 기른 유기농으로 먹어야한다는 슬로푸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출발했다.

슬로시티 지정이후 달라진 것이나 주민들의 반응은.

슬로시티 선언 초창기에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들은 ‘과연 차량 운행 없이 외지인(관광객)들이 오겠나’며 수백 명의 상인들이 8일간 상가를 철수하고 시청에 찾아와 항의하는 등 반발도 컸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시행해 보니 오히려 관광객들이 천천히 걸으며 상점에 더 많이 들르게 되자 불평이 사라졌다. 이제는 시민들이 눈앞의 편리만 좇을 게 아니라 당장 불편해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 옳았다는 평가를 내려주고 있다.

슬로시티가 오르비에토에 준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인가.

관광객들이 늘어난 것이다. 인구 2만명이 조금 넘는 이곳에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오로지 슬로시티의 발상지라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200만명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늘어날 것에 대비하고 있다.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차장 시설과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한다.

오르비에토에서 슬로시티 완성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나.

시민들이 슬로시티 유지를 위해 불편을 겪고 있는 부분은 교통문제다. 시내중심의 차량 통제를 위해 공용 주차장의 증설과 전기 버스 운행, 도시 한복판의 쓰레기 처리 등 주로 교통관련 예산에 집중하며 깨끗한 도심 거리를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얼마나 되며 어느 나라가 주로 오나.

연간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이중 외국인 관광객들의 비율이 45% 이상인데 앞으로 계속 늘어 7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세계 230개 슬로시티를 찾아다니는 마니아들이 늘고 있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도시들이 상호 네트워크를 통해 인근 도시를 소개 해주고 있다. 외국인들 가운데 미국인과 영국인 방문객이 가장 많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많은데 한국인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40% 정도가 이곳에서 숙박을 하고 있다. 오르비에토에서 1주일 이상 숙박을 하면서 주변 도시를 관광하는 장기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슬로시티를 준비 중인 지자체에 전해주고 싶은 말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어디든 완벽한 슬로시티는 없다. 오르비에토도 매일 만들어 가고 있는 곳이다. 시민들을 설득해 슬로시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잠시의 불편을 감수하면 오히려 그 안에서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슬로시티는 끝없이 완성을 시켜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화로 쉽게 가자는 욕심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관건이다. 특별히 좋은 자연 경관이 있어 세계문화유산이나, 자연경관으로 선정이 된다면 슬로시티로 지정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태안신문 신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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