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는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자행된 군사적 침략행위였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수월하게 하기 위해 침략국가들은 중앙집중적 강압통치방식을 채택했고, 피식민국가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야만적이라고 규정하고 배제했다.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일제 역시 총독부 체제의 일사분란한 통치방식을 이식했고, 중앙과 지방간의 관계는 철저한 복종관계로 바뀌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유지해주던 향촌 사회의 자치적 전통이 소멸되고, 중앙권력이 산골마을까지 일일이 통제하고 간섭하는 식민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지방행정기구도 식민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개편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336개의 전통적 군과 현(郡縣)을 220개로 통폐합했다. 1917년엔 중앙의 직접 지배를 받는 면단위 중심의 행정기구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일제가 지방자치를 완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이나마 지방자치를 일부 허용하기도 했는데, 본국 수준의 자치를 요구하는 재한 일인들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한반도 각지에 진출한 일인들은 일본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자신들의 이해가 반영되길 강력히 요구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지방자치가 먼저 실시되었다. 총독부는 1914년 조례제정권을 가진 부제(府)를 설치하고, 총독이 임명하는 부윤(府尹)의 자문기관으로 부협의회를 설치했다. 1917년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은 23개 면에 부분적인 자치기능을 부여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제한적이나마 조선인들에게도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3·1운동을 통해 일제는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고, 보다 온건하고 유화적인 식민지배 방식으로 소위 문화통치를 선언했다. 한인들에게 언론자유와 교육기회를 확대하고, 지방자치권도 일부 허용되었다. 중앙참정권을 거부하는 대신, 부분적으로나마 지방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친일 협력세력을 확보하여 안정된 식민지배를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근대적 형식의 자치기구가 도입되기 시작되었다. 1920년에 도평의회, 부협의회, 면협의회 등의 자치기구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설치한 자치기구는 의결기관이 아닌 자문기관에 불과했고, 한국인들 중에도 극소수 자산보유층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허용된 형식적인 지방자치제도였다. 그 결과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시대 향촌질서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지방유지층이 형성되고 새로운 지방통치 문화가 형성되었다. 조선왕조 시기의 지방 사족들은 향약, 향교와 서원, 그리고 그들 나름의 권위를 바탕으로 지방사회를 교화하고 지배했다. 비록 신분계급제에 기반한 불평등한 제도였지만, 조선시대 지역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권력자들은 적어도 그 지역에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을만한 양반 선비층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지방자치 대표자들은 조선왕조 시기의 지방사족들과는 달랐다. 도덕적 권위는 물론이고 최소한의 자치권한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한인 도회의원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양반선비 층과 같이 전통적 지방 엘리트가 아니라, 금융과 상업 등 부문에 기반을 둔 신흥 자산 계급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 중앙권력에게 협력함으로써 지방에서 자신의 권력이나 경제적인 이익을 유지 내지는 확대하려는 친일파 조선인들이었다. 일제가 허용한 자치기구들은 자문기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시 지방유지들은 합법적인 자치활동 보다는 로비, 향응, 청탁 등 뒷거래 관행에 의존해야했다.

일제 강점기 도입된 근대적 자치행정 기구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자치제도와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식민지 시절 자치기구를 대표하는 조선인들은 대부분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이었고, 민족과 지역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역의 대표자로 나선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대표자들은 일제 중앙권력의 하수인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적 자치기구는 조선 전래의 전통적 자치문화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지방자치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지 유산이 청산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중앙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지역의 대표자가 되는 올바른 자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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