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우리 부부이야기 강홍강·성화순 부부

소리없이 겨울비 내리던 날, 호젓한 길을 걸어 행주서원 강홍강 원장 댁을 찾아갔다. 거실바닥이 반짝거린다. 테이블도, 책상위도 반짝거린다.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보고 싶을 만큼 깨끗하다. ‘칙칙칙’ 압력밥솥이 김을 뿜어내며 구수한 밥향기를 풍기고, 칼칼한 향의 생선조림이 ‘보글보글’ 익어간다.
“늦으면 그냥 가시니까 저녁부터 드시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밥을 준비해주신다. 국 대접에 한 그릇 가득 밥을 퍼주셨다. 난생 처음 고봉밥이다. 생선 빼고는 다 밭에서 수확한 것이라고 한다. 갓 푼 찰진 밥 한 숟가락에 시금치나물, 배춧국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밥이 보약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내자가 잘해주니 밖에 나가 큰소리 칠 수 있죠." 강홍강 원장의 이 한마디에 아내에 대한 정이 묻어난다.

마마 앓던 3살 아들 목숨 지킨 어머니
1943년 만주의 삼강성에서 태어난 강홍강 원장.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면장 출신인 할아버지께서 징용을 피해 5남매를 데리고 만주로 가셨고, 거기서 토목회사에 들어가셔서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통역을 하셨다고 해요. 충청남도에서 사시며 5판서의 따님이셨다는 할머님도 당시 정신대를 피해 만주로 오셨다가 할아버님을 만나 결혼하셔서 저도 만주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강 원장의 가족들은 1944년 당시 원산, 평양서 서울로 통학하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경원선을 타고 종로로 들어와 새 터전을 만들었다. “3살 때 제가 마마를 앓았죠. 부친은 동아일보 수습기자였고 가족들은 종로 관철동 살 때였는데, 열이 60도를 넘었어요. 마마가 대유행을 했고, 마마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똥마차에 실어 왕십리에 버렸었는데 어머님이 거의 죽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봐주셔서 이렇게 살아났다”고 한다. 아들의 목숨을 지킨 모친(96세)은 지금도 건강한 모습으로 내외의 효도를 받고 계시다.


강 원장 가족이 행주에 정착한 건 6·25 전쟁 때 공주에서 3년간 피난생활을 하고 돌아오면서였다. 강 원장이 열 살 무렵이던 그 당시 많은 일을 해오던 부친이 일에서 손을 떼면서 5남매 맏이였던 강 원장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일도 하고 공부도 독학으로 해야 했다.
그러다 그가 취직한 곳이 능곡역에 있던 대한통운 출장소였다. 당시 열차로 수송하는 수화물을 담당하는 대한통운에 사무장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여기에 근무하고 있을 때 아내를 만났죠. 당시 18살의 아내는 양갈래로 땋아 묶은 학생머리를 한 날씬하고 참한 모습이었어요.”

장인어른 설득으로 아내와 결혼
당시 아내의 가족은 아산에 살다가 일산역전에서 청과장사를 막 시작하던 때였다. 이삿짐들이 모두 대한통운이 있는 능곡역에 도착했다. 이때 짐을 찾으러 온 아내를 보게 된 것이다. “당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죠. 아내를 보자마자 학생 중 한 명에게 부탁해서 짐을 날라다주고, 어디 사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는 매일 찾아갔다. 마마를 앓은 그에게 고운 딸을 주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한 달이 되어가자 장인이 아내를 설득했다. 집안도 괜찮고, 생활력도 있어보이니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달만에 결혼을 했다. “저는 싫었죠. 무슨 한 달만에 결혼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이 있는 사람한테 가면 대접받고 살 수 있고 시부모도 좋으신 분이니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안간다고 했는데도 밤낮 집으로 찾아오니 할 수 없이 등떠밀다시피해서 시집왔는데 술 먹고 두들겨 패지도 않고 생활력 강하고, 그러니까 살았죠.”라고 아내가 말한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서 정식으로 아내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 안에까지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아내의 오라버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먹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나였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방에 못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길을 가다가 곰보라고 누군가 놀리면 한 주먹 휘둘러야 성이 풀렸던 그였지만 사랑하는 이를 얻기 위해서는 낮춰야 했다.
그렇게 허락을 받은 후 이제 아내가 신랑댁 어른들을 뵙기 위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왔다. 색시될 아가씨가 얼마나 이뻤을까. “기차 막차를 보고도 안 태우는 거야. 결국 일산까지 8.6㎞를 걸어갔어요”라며 볼멘 아내의 말에 “그래서 밤가시 고개부터는 내가 업고 갔잖아”라고 씽긋 웃는 강 원장. 어려운 자리에 한복을 입고 있느라 힘들었던 아내가 결국 체했던 것이다. 12월 추운 밤길에 아내 될 여인을 업고 가는 총각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을까!

25세 신랑과 18세 신부가 앳된 모습으로 전통혼례를 올린 모습

밖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건 아내 덕분
그렇게 18세 소녀와 뚝심 하나로 버티기를 한 25세 총각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겨울에는 눈이 엄청 많이 왔어요. 허리께까지 눈이 와서 교통이 두절되고 했으니 어디 예식장에 가볼 수도 없었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려니 아내가 무신론자여서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통혼인식을 하게 된 거죠.”
세이코 손목시계와 반지 3돈 옷 한 벌을 예물로 준비했다. 하지만 결혼은 행복 끝 고생 시작이었다. 정치활동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강 원장은 결혼하자마자 서울로 시골로 다니면서 돈이 될 만한 일은 다 했다. 전화국 하청업, 건설건축업을 하다가 1970년 11월 1일, 행주산성 성역화사업으로 행주산성 경비원을 뽑을 때 초대직원으로 들어갔다.


그후 아내와 함께 행주산성 성역화사업 공사장에 밥장사를 했다. 인부 10여 명을 하숙쳤고, 20여 명의 점심밥을 해서 이고 날랐다. 나무를 해다 때가면서 밥해먹고 물 길어 쓰던 때였고,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큰 함지박에 온갖 음식을 준비해서 머리에 이고 날라야 했던 때다. 인부들 상대로 밥장사 하고, 인근에 있던 동아일보 소유 부지 약 3만5000여 평 농사도 지었다
“밥장사 하면서 1달에 한 번씩 밥값 계산해서 나오면 몇 백만원씩 나왔어요. 집에서 먹는 사람들 두 끼씩 10여 명, 공사장에서 점심만 먹는 사람 20명이었으니….”


그 일이 마중물이 되어 살림이 든든해졌다. 4명의 시동생들 교육시키고, 시집장가 보냈다. 시아버님 초상도 치르고 이제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젊은 시절 너무 힘들어서 떠나버리고 싶었죠. 그런데 참고 살면, 한 번 실수는 씻을 수가 없어서 또 시집가봤자 이혼하고 또 산다는 소리 듣게 될 거라 생각했죠. 젊은 새댁들 속상하다고 이야기 하면 참으라고 이야기를 잘 해줘요. 우리는 이제 서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에요.”(아내)


아직도 농사가 많다. 고추·콩·들깨·참깨·녹두·팥 등 온갖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절대 안해요! 저 혼자 일 다 해놓으면 향교, 서원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내가 해줄 건데 왜 혼자했냐’고 타박만 하죠!”라는 아내의 푸념을 듣는 강 원장. 타박도 푸념도 칭찬처럼 들리는지 웃기만 한다.
“내자가 잘해주니 밖에 나가서 큰소리 칠 수 있죠. 근데 집에 들어오면 싹싹 빌며 살아요!”라는 강원장의 말에는 내자에 대한, 아내에 대한 정이 듬뿍 묻어난다. 이제는 서로 없어서는 안될 사람….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부부가 가는 길인 것 같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