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자유청소년도서관장
버젓한 직장을 그만 두고, 돈도 안 되는 작은도서관을 개관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격려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끌탕을 쳤을 게 분명하다. 남들은 다 주류에 편승하려고 몸부림인데, 팔자 좋게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는 삶을 선택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직장 다닐 때 장난삼아 동료들이 지어준 호가 ‘월천(月千)’이었다. 매월 천만 원씩은 벌라는 소망을 담겨있었다. 천만 원은 아니었지만, 남부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벌어놓은 돈도 없는 상태에서 덜컥 직장을 그만 두었다.

뭐 엄청난 비전이 있어서 그만 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니던 직장에 비전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리라. 그냥 그만 두고 싶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평소에 보던 책들로 서재를 꾸미고, 아는 친구에게 탁자와 의자를 얻고, 아는 형에게 간판과 썬팅을 맡겼다. 2008년에 도서관을 열었으니 벌써 10년이 다 되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크게 변한 건 없다. 망하지 않은 게 오히려 기적이다.

굼벵이도 기는 제주가 있다고, 알량한 교양에 기대어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몇 해 동안은 고생을 했다. 겨우 풀칠할 정도의 수입이 주어졌다. 아내와 맞벌이를 했다. 아이들은 다행히 학원타령을 하지 않았다. 강의문의가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바쁜 척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스케줄을 갖게 되었다. 인문학으로 돈을 벌 수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고양으로 이사와 15년이 지났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같이 삶과 고민을 나눌 동지들도 생겼다. 뚱뚱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텃밭농사도 벌써 8년째다. 이제 겨우 작물의 특성을 이해하고, 철따라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아는 정도가 되었다. 체력은 아직도 저질이다. 체력으론 안 되지만 기생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니,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기대서 산 것이 분명하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다들 고마운 사람들이다. 빌붙어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살아보니 들끓었던 젊은 시절은 어느덧 가버리고, 뜨뜻미지근한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불씨가 아직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살다보니 지혜라는 것도 약간은 생겼다. 인생은 보태기와 덜어내기에 연속이며, 나이가 들수록 덜어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보태려고 욕심내다가 상처를 많이 입었다. 보탤수록 더 결핍이 느껴졌다. 덜어내기를 배우니 한결 삶이 편안하다. 점점 ‘쓸모 없는[無用之用]’ 인생이 되려고 노력해야겠다. 장자와 노자에게서 배운 지혜다.

인문학도 그런 것이리라 상상해본다. 계속 쓸모를 쌓아가는 주류인문학이 있는가하면, 쓸모를 덜어가는 하류인문학도 있는 법이다. 욕망을 채우려고 상승하는 인문학이 있는가하면, 나눔을 실천하려 밑으로 흐르는[下流] 인문학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인문학이 하류인문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키우고,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 흐른다. 내 삶이 그러하기를, 병신년에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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