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상만 인권운동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례도 그중 하나다. 나라가 주권을 잃고 일제 식민지배로 고통받던 시절, 일제는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할 목적으로 어린 처녀들을 납치하여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시켰다.

살아남은 피해자 증언은 기가 막혔다. 어떤 이는 밭 일을 하던중 뭘 물어 볼 것이 있다는 말에 속아 끌려 갔고, 또 어떤 이는 동네 우물에 물 길러 가는 길에 납치되어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속이거나 납치되어 끌려간 어린 소녀들은 이후 필설로 다 쓸 수 없는 지옥의 한 가운데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러한 증언이 차고도 넘쳐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홍성필 교수가 쓴 논문에 의하면 일본군이 위안부 운영에 직접 관여한 때는 1937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약 80여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같은 일본의 국가 범죄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때는 1991년 8월의 일이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故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있게 그 만행을 폭로하면서 부터였다. 이후 한 분, 두 분이 “나도 피해자”라고 나서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들 피해자 분들의 입장은 한결 같다. 역사적 잘못에 대한 일본 정부의 명확한 사과와 그에 따른 법적 배상을 하라는 것이 핵심골자다. 이러한 요구를 일본 정부가 수용하라며 지난 1992년 이래 오늘까지 만 24년째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를 중단없이 지속해 왔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일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표리부동이었다. 그러다 변수가 발생한 것은 지난 2015년 12월 28일이었다. 한일 양국의 외교장관이 ‘일본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전격 합의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오랜 세월, 갈망해 오던 일본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이뤄지는 순간이 되었을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결말이 되었어야 할’ 피해자 할머니들은 2016년 1월 6일, 더 큰 분노로 1212번째 수요집회를 열고 다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외쳤다. ‘한일 양국 합의 파기하라.’

왜 피해자 할머니들은 이 외교적 합의를 파기하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일본의 표리부동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극악한 범죄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라는 것은 말이 아니고, 진심이어야 한다. 사과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위해 ‘사과 쇼’를 했다. 그것도 아베 총리가 아닌 외무 대신의 입을 빌어 지극히 정치적이며 외교적인 발언으로 진실을 호도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일은 우리 정부의 태도이다. 한마디로 피해자 할머니와 대한민국에게 더 큰 굴욕감을 준 잘못된 합의였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아베 보수정권을 상대로 한 최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 정도의 합의도 쉽지 않았다며, 만약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정부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역대 어느 정부도 해 내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한 것”이라며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 수준의 합의는 할 수 없다’며 과거 정부도 하지 않은 일을 현 정부가 잘못 합의한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이 7가지가 일본정부에 피해자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이다. 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합의를 해 놓고 이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가 당해도 마찬가지다. 불가역적 주장, 터무니없다. 협상 다시 하라.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