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자유청소년 도서관 관장
플라톤은 그의 저술 『정체』에서 세상의 정치체계를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명예정체(timokrat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emokratia), 참주정체(tyrannis) 등으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정체에 지성, 명예, 돈, 충동, 탐욕을 대응시켰다. 자신의 스승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끈 민주정체가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민주정체를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정체란 가난한 사람들이 승리하여 다른 편 사람들을 죽이거나 추방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평등하게 시민권과 관직을 배정하고, 관직들을 대부분 추첨으로 할당할 때 민주정체가 생기는 거야.” 이 정체에서 청년들은 “오만 무례함을 교양으로, 무정부 상태를 자유로, 낭비를 도량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용기라고 부르면서, 청년들을 자유방임 쪽으로 이끌고 갈 거야.” 그러다가 무정부 상태에 이르러, “아비가 자식을 두려워하고, 자식은 아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생이 학생들을 무서워하며 이들에게 아첨하고, 학생들은 선생을 무시하며, 젊은이들은 연장자들을 흉내내며 말로써 이들을 맞상대하고, 노인은 젊은이들을 흉내내며 채신없이 구는 지경이 되네.”

가히 민주주의에 대한 멸시와 경멸이라 할 만하다. 귀족적 풍모를 자랑하는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거의 무정부 상태로 평가하였고, 독재로 가는 전 단계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끌어들이자면, 민주주의는 어두운 동굴 속에 그림자놀이 같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플라톤이 염원했던 정체는 지성으로 똘똘 뭉친 소수의 최선자들이 통치하는 최선자정체, 소위 철인정치였다.

선거가 한창이다. 울긋불긋한 정당들의 후보가 나와서 자신의 탁월함을 뽐내고 있다. 거리에 피어있는 봄꽃처럼 화려한 색깔과 언사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선거철이면 악수로 관절염이 생기고, 인사로 디스크가 생긴단다. 때 맞춘 겸양과 미소가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의사당은 정원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다시 한숨의 세월을 견딜 것인가.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최선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망각한다. 민주주의 정치는 행정부나 입법부나 사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 가정에, 마을공동체에, 지역에 살아 숨쉬는 정치로 작동되어야 한다. 그 작동의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선거 당일, 줄서서 투표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투표행위를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 투표는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나보다 탁월한 자들이 뽑히면 그들이 나 대신 민주주의를 실현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신념하면서 탁월자 정치를 옹호하는 것만큼 착오적이다. 민주주의는 평범함이 탁월함을 극복할 때 실현된다.

귀족주의자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 승리해서 얻어낸 결과이다. 가난하다는 말이 눈에 거슬린다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재벌이나 재력가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명문 대학 출신들이 활개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역에서 큰소리치는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가난이 뭔지 뼈저리게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회로, 행정부로, 사법부로, 지방자치체로 진출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김경윤 자유청소년도서관장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