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村) 황희(1397∼1450)정승은 한 나라의 왕조가 바뀌는 혼란한 시기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20년이 넘도록 재상의 자리를 지키며 명재상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막바지로 치닫던 공민왕 12년 개성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7세이던 때(창왕1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고려가 망하자, 다른 동료 선비들과 함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廣德山) 기슭의 두문동에 은거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바로 이때 생겨났다.


태조의 요청으로 출사한 뒤에는 경명수행에 뽑혀 주로 세자를 가르치는 직에 머물렀고, 태종의 등극 후에는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절랑을 거쳐 우사간대부가 됐다. 이후 지신사(도승지)로 활약하며 태종의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숙청에 관여했고, 형조, 예조, 호조를 거쳐 이조판서로 활약했다. 이때 방촌은 하루라도 얼굴을 보지 않고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태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나,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세종)을 세자로 삼으려는 태종에 반대하다 교하(交河)와 남원 등지로 6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내야 했다.


1422년 세종4년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를 불러들여 중용할 것을 권유하였다. 태종은 수많은 신하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유배 중에 있는 죄인을 중용하도록 천거했을까. 1462년 문종이 내린 교서에 의하면 방촌의 인물됨을 “임금을 과오 없는 데로 인수하고, 백성들을 안정한 데로 이끌기에 힘썼으며, 조정의 법도는 뜯어고치기를 좋아하지 않고 평소의 논의는 모쪼록 관후(寬厚)함에 힘썼다”라고 적고 있다. 건국초기 무엇보다도 국가대사를 신중하면서도 확고한 원칙을 갖고 왕조를 기틀을 세워야했던 중차대한 시기에, 황희의 저 같은 성격이 세종을 보필하기에 최적이라고 판단한 태종의 맞춤형 인선(人選)의 결과였다.


황희의 출생비화에 의하면 그가 임신되자 송악산 기슭의 폭포에 물길이 끊어져 있다가 그의 출생과 함께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이상히 여긴 부친은 아들이 “기쁘게만 산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외자인 희(喜)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촌의 일생을 지배한 좌우명이 된 것은, 젊은 시절 암행어사로 지방을 순회하던 중 소 두 마리를 몰고 밭갈이를 하고 있는 노인을 만나 불언장단(不言長短, 남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의 교훈을 얻고 부터이다. “이것도 옭고, 저것도 옭다”는 식의 이른바 우유부단한 그의 정치철학은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적절히 조율하며 임금과 백성을 태평성대로 이끌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당대의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지만, 그 또한 허물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가 대사헌 시절 금을 뇌물로 받은 사건이 터지면서 ‘황금 대사헌’이란 비난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난신(亂臣)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고, 여러 차례 매관매직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의 나이 68세(세종12년)이던 때 사헌부에 사적인 청탁을 한 것이 문제가 되자, 그는 좌의정의 자리를 내어놓고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내려와 있었다. 이때 세종은 대신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를 다시 불러내어 영의정의 자리에 앉혔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분명 부패한 관리에 가깝다. 하지만 당시 그의 허물은 주연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된 행동처럼 보이는 것은 어인 일일까. 그는 칼날 같은 엄중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언장단’으로 상하좌우를 이어주고 연결하는 고난도의 연기를 성공적으로 펼친 것은 아닌지. 방촌은 87세로 영의정에서 물러나기까지 총 56년간 공직 생활을 하였고, 그 중, 영의정 18년을 포함 총 24년간을 재상에 머물면서, 세종을 보필한 햇수만 27년이다. 세종이 승하하고 2년을 더 수(壽)하다 90세에 졸하였다.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경영학)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