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孤雲) 최치원(857~?) 선생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로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며,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문명(文名)을 떨친 우리민족 원조 한류 스타였다. 또한 그는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풍류(風流)의 기원과 함께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외래종교의 핵심진리를 포함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정신문화가 존재했음을 밝힌 최초의 인물이다.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 또는 해운(海雲)이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12세(868년, 경문왕 8)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야 했다. 이때 “10년 이내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 견일(肩逸)의 가혹하리만큼 간절한 염원을 품고 공부에 매진한 지 7년째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고운에게 기회가 온 것은 879년 소금장수 출신의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조정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다. 조정은 반란군을 토벌할 책임자로 당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였던 고변(高騈)을 지정했고, 고변은 막 과거에 급제한 젊고 유능한 고운을 자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했다. 이때 고운이 초안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받아든 황소는 글을 읽다 놀라 침상에서 떨어진 이후 관군에 진압됐다. 이로써 고운은 문장력 하나로 반군을 진압한 인물로 중원(中原)에 그의 이름을 과시했다.


고운은 당나라에서 영달(榮達)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고국 신라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나이 28세(885년)이던 때에 서둘러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고국 신라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10조(條)’라는 개혁안을 만들어 건의하지만 곧, 진골 중심 신분제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는 6두품의 신분으로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飡)을 끝으로 외직(外職)인 태인, 함양,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로 전전하며 소요자방(逍遙自放)과 저작활동에 몰두했다.


고운에 관련된 여러 기록물 중에서 오늘날 가장 주목할 대목은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 기사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郞碑序)다. 원래는 화랑(花郞)인 난랑의 행적과 화랑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포함한 긴 문장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쉽게도 화랑에 대한 간략한 지적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화랑도의 정신과 이념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역사적 단서임이 분명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이른다. 그 교(敎)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 : 孔子)의 주지(主旨)이며, 또 그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말없는 교(敎)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 : 老子)의 종지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釋迦)의 교화이다.”
부언하면 고운이 ‘난랑비서’를 쓸 당시에「선사」라는 문헌이 존재했고, 거기에 삼교를 아우르는 화랑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풍류’에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는 의미다. 고운은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다 신선(神仙)이 되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몇몇 영험한 도인들은 가야산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오늘의 후손들이 멋과 풍류를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계속 지켜보고 계신 것은 아닐지? 선생께서는 고려 현종 14년에 문창후(文昌侯)로 추존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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