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877~943)은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궁예 밑에 들어가 태봉의 장수가 되었던 인물이다. 전장에서의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최고의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 오른 그는 휘하의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주군을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시켰다. 태조는 건국초기, 나라의 기반이 잡히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각 지방 토호(土豪) 세력가들과 중복혼인을 통하여 지방에서의 빈발하는 소요와 반란을 무마하려는 정책을 통해 무려 29명의 부인으로부터 25남 9녀의 자녀를 두어야 했다.


태조 왕건이 첫 번째 부인이자 신혜왕후(神惠王后)로 봉해진 유씨(柳氏) 부인을 만난 것은 아직 그가 궁예의 휘하에 있을 당시였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경기도 덕풍) 지역을 지나다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는데, 마침 이 고을 이름난 호족 유천궁(柳天弓)의 딸이 길 옆 시냇가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왕건은 유천궁의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고, 이때 유공자는 자신의 딸로 하여금 왕건을 모시게 함으로써 부부의 연이 맺어졌다. 이후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왕건이 이에 거절하므로, 유씨 부인이 ‘천명(天命)을 거역하는 것은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손수 지은 갑옷을 입혀 주고, 장수들로 하여금 그를 옹위케 하여 남편을 왕위에 오르게 만들었다.


한편 왕건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장화왕후(莊和王后)로 명해진 오씨(吳氏) 부인은 나주(羅州)사람으로 왕건과의 첫 만남에는 몇 가지 설로 나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왕건이 나주에 진주하여 시냇가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시냇가에 다가가니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어 동침을 요구했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하나에는 왕건이 나주 지방에 출진하여 각 부대를 순찰하던 중 어느 우물가를 지나는데, 마침 물을 긷는 젊은 처녀가 있기에 물 한 바가지를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현재 나주 시청 앞 공원에 마상(馬上)의 왕건과 버들잎을 띄운 물바가지를 올리는 오씨 부인의 모습이 조각품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기록들에 의하여 첫 번째 유씨 부인이 왕건을 만날 때의 나이를 18세 정도로 추정하며, 오씨 부인이 왕건과 만날 때 나이는 17세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은 오씨 부인이 유씨 부인보다 한 수 위에 있었던 듯하다. 고려사에는 당시 왕건과 오씨의 동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서 동침을 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寒微)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왕건으로서는 이미 정혼한 아내를 두고 있는 몸으로, 서자(庶子)가 적자보다 먼저 태어날 경우의 불편함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오씨 부인은 ‘장군님께서는 소녀를 한낱 노리개(창녀)로 보시는 모양이신데, 저는 장군님의 아이를 낳아 장차 장군님의 정식 아내가 되겠다’며 단호한 태도로 돗자리에 쏟아진 정액(精液)을 손으로 찍어 자신의 몸(질)속에 넣을 정도로 당찬 여인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왕건의 뒤를 이어 고려 제2대 왕위에 오른 혜종(惠宗, 912~ 945)이다. 따라서 혜종의 이마에는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당시의 백성들은 그를 ‘돗자리 대왕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버드나무 우물가에서 왕건을 만나 그로 하여금 한 나라를 열게 하고, 자신은 후사(後嗣)도 영광도 뒤로 한 채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신혜왕후 유씨. 자신의 미미한 신분적 열세를 딛고 왕자를 생산하여 대통을 이어가게 만든 장화왕후 오씨. 과연 그 누가 진정한 한국여인의 참모습이었을까? 그간 수많은 호사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두 여인의 모습이다.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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