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자유청소년도서관장
얼마전 시인 송경동의 출판기념회의 다녀왔다. 송경동은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현장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그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거리의 시인이다. 이번 시집에도 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시가 되어 묶여있었다. 그는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 어떤 위대한 시보다 /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노래한다. 시집 제목도 도발적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인데 한국인이 아니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 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 정신은 혼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멀쩡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700일이 넘도록 자식의 죽음을 밝혀달라며 싸우는 세월호의 부모들은 과연 한국인인가? 아니 그 이전에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안산고등학교의 아이들은 과연 한국인인가? 그들이 한국인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그러한 대접이, 그러한 외면이 가능하단 말인가?

헌법도, 대법원 판결도, 사회적 합의서도, 근로계약서도 휴지조각처럼 취급당하며 부당하게 조직이 불법으로 몰리고, 회사에서 해고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연 한국인인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지만 결국 존엄하고 정상적인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안전한가? 우리의 청년들은, 우리의 자식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출생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이 한국에서 실현가능해질 때 확인되는 것이다. 삶의 터전과 근거가 점점 무너져내리는 세상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철학자 고병권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라는 책에서 니체를 인용하며 ‘지하생활자’를 소개한다. 지하생활자는 플라톤의 ‘동굴 밖 철학자’와는 대비되는 유형으로 “바닥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사람”이며 “근거 아래에서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자”이다. 그리하여 “근거들이 몰락할 때 ‘심연’이 열린다.” 니체는 심연 위에서 춤을 출 자유정신을 노래한 자였다. 그리하여 고병권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민주주의란 특정한 근거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이전에, 자기 근거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정체이며,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의 근거를 몰락할 위험을 각오하고 비판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개방하며, 그런 개방을 통해 정체의 갱신의 힘을 얻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다. 가히 지옥에서 천국을 상상하는 의지라 할 것이다.

국회위원 선거가 끝났다. 여대야소의 공포감 속에서 치러진 총선은 예상 밖으로 여소야대의 결과를 낳았고,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소야대는 국회의 상황이고, 국회 밖은 여전히 아수라장이다. 조선업의 몰락이 목전에 다가왔고, 그에 따른 대량해고사태는 불보듯 뻔하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이 밥줄을 잃게 생겼다.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안전하고, 누려야할 사람들이 지옥으로 몰리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누가 집필하는지도 베일에 쌓여 있는 국정교과서도 일정대로 추진한단다. 국민의 심판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정권이 지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환상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은 운동경기에서만 확인되는 것인가? 선거가 끝난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민주주의에 대해 숙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국회로 입성한 국회위원과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그리고 기꺼이 감옥에 들어가겠다는 시인과 우리의 거리는 얼마나 멀고먼가? 우리는 과연 한국인인가?

 

김경윤 자유청소년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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