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자유청소년도서관장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평소라면 ‘묻지마 살인’이라고 칭해질 이 사건은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으로 해석되어, 수많은 추모인파가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들었고, 전국적 이슈가 되었다.

살해자의 정신상태를 분석하여 실체를 밝히는 것과는 별도로 ‘여성혐오’논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에게 위험한 사회인지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두운 길을 홀로 걷는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의 심리를 비교해보면, 여성의 경우 낯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대부분 공포감을 느낀다고 한다. 남성은 겪을 수 없는 감정을 여성은 누구나 겪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곳 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면,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아직도 안전한 주인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받는 난민(難民)인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서울 지하철 2호선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인 청년 하청노동자가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가 소지한 가방 속에는 간단한 작업공구와 필기구, 숟가락과 일회용 나무젓가락, 그리고 컵라면이 들어있었다. 밀려오는 노동업무로 안전수칙도 지키지 못했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이 청년의 죽음은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그 어린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릴 때,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은 그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청년은 한국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정착민인가? 그 역시 권리조차 주장할 수 없었던 일개 난민이 아니던가?

뉴욕타임즈가 지난해 11월 세계 난민의 숫자는 총 600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시라아 난민의 숫자만도 80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전쟁이나 이념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재화(災禍)를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으로 가는 사람만이 난민이 아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직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도 난민이 아니던가. 뿐인가? 자신의 터전에서 안전하게 살지 못하고, 차별당하고, 혐오당하고, 따돌림 당하는 이 땅의 수많은 국민도 난민과 다를 바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지방출신이라는 이유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애도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수많은 청년 또한 이 땅의 난민들이다. 그들에게 이 땅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실낱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헬조선’이다.

2000여년 전 이스라엘 난민이었다가 다소라는 곳에 정착한 유대인 바울은 처음에는 기독교를 박해하다 나중에는 회심하여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후 그는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기득권도 내려놓은 채, 기독교의 사도가 되어 난민으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쓰레기처럼, 찌꺼기처럼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바울뿐이랴. 나는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울이 난민이 되고나서야 그의 종교는 보편성과 세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확장된 것은 바로 이 난민정신 때문이었다.

여성혐오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여성성을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난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난민임을 깨닫는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도 어느 때든 난민이 될 수 있는 처지임을 각성할 때, 난민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니 난민처럼 사고하고, 난민처럼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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