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 분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이고,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오세 신동(神童)’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천재였지만, 그는 한평생 ’아웃사이드’의 지식인으로 사람들로부터 광인(狂人)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부귀와 공명(功名)과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용기 있는 사상가였다.

매월당은 3세 때 이미 글을 짓고, 5세에 이르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는 재능을 보였다. 집현전 학사였던 최치운이 이를 보고 기특한 재주를 가졌다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으니, 천재가 태어났다는 소문은 어느새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세종은 김시습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으나 소문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대신 시험해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어린 시습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여러 차례 문장력을 시험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시습은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세종은 김시습이 좀 더 성장하고 학문이 완성된 다음 나라의 큰 재목으로 쓰겠다는 약조와 함께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어 주었다. 어린 나이에 성은을 입게 된 매월당은 마치 임금님께 이를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13세에 김반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익히고, 윤상으로부터 '주역'과 '예기'와 '사기'를 배우며 학문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여 갔다. 그러는 사이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단종의 양위 소식을 접한 매월당은 3일 동안을 통곡한 다음 천륜(天倫)을 배신한 세조 밑에서는 절대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웠다. 이때 매월당의 나이는 약관 21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게 되었다. 1456년 6월, 세조가 정권을 잡은 지 어언 3년여가 흐른 다음,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단종복위’ 계획이 탄로나면서, 광화문 네 거리에는 갑자기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死六臣)들의 시신과 선혈로 낭자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세조치하에서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치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매월당이 처참하게 찢어진 시신들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 산기슭에 갖다 묻은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사육신의 묘지다. 죽음을 불사한 매월당의 기행(奇行)에 놀란 세조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게 하자, 매월당은 온 몸에 인분(人糞)을 뒤집어 쓴 채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매월당이 세조의 부름을 뿌리치고 발길을 향한 곳은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남산)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눈부신 재능’을 펼치지 못한 한(恨)을 불교적 설화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바로 ‘금오신화’다.

1481년 그의 나이 47세에 이르러 잠시 환속하였으나,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는 등 자신의 명덕(明德)을 펼치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였다. 그는 다시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되어, ‘신인술가(神人術家), 괴한기승(怪漢奇僧)’이란 평을 들어야 했다. 결국 매월당은 자신의 재주를 세상을 향해 단 한 번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부여 무량사에서 세수 59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입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불의의 시대와 맞서 초연하게 명예와 재물을 버릴 수 있었던 만세의 사표(師表)가 아닐 수 없다. 훗날 율곡(栗谷)이 지은 '김시습 전'에 의하면 매월당은 ‘심유적불(心儒跡佛) 즉, 선비의 마음을 갖고, 스님의 족적’을 남겼다고 적고 있다.

최 재 호 전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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