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고양문화운동 50년간 펼친 이은만 문봉서원장


 

<사진=이성오 기자>

 

스물다섯, 공매처분될 공양왕고릉 사적지정에 앞장
고양군청 첫 터인 원당에 지하철역 유치 이끌어내
일산신도시 개발 땐 지표 재조사토록해 볍씨 발굴
공릉천변에 시민 참여하는 송강 시비공원 추진 중
“고양은 강직한 선비의 고장, 그 정신 이어갔으면”

“이은만을 아끼는 이들은 그의 고집스런 문화운동을 말렸다. 우선 돈 되는 일부터 하라고. 그래도 막무가내였던 그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의식했는지 자기 무덤의 비석에 새길 비명(碑銘)을 정해 놓았다. ‘남이 안하는 일만 골라서 한 사람이 이곳에 묻히다’라고. 자부(自負)인지 자조(自嘲)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평생 행적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임준수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이
55년지기 이은만 문봉서원장에 대해 쓴
페이스북 글 中 

이은만(75세) 문봉서원장이 고양에서 ‘남이 안하는 일만 골라’ 지역운동을 한 지 올해로 꼭 50년이다. 원당리에 전기를 끌어들이고, 삼릉간이역과 원당역을 유치하고, 형식적인 일산신도시 지표조사에 항의해 재조사를 이끌어내고, 철거 직전의 일산밤가시초가를 살려내고, 송포호미걸이의 문화재 지정을 건의하고…. 지난 50년간 도시화의 급물살 속에서 그가 지켜낸 고양의 역사와 문화는 수없이 많다. 그 공이 오롯이 그의 차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중심에 그를 두는 건 맞다.
 
운명이 된 비석 한 조각
“물난리가 나서 옛 사진을 거의 다 잃어버렸는데, 이건 용케 남았더라고.”
그가 내민 사진 속엔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깨진 비석 조각을 맞추려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다. 열여덟 살(서울 성동고2)이던 그가 여름방학 과제인 ‘고향의 역사 유적지 조사’에 나섰다가 두 동강난 공양왕고릉 비석의 한 쪽을 찾아내 몸체에 맞추던 모습이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시멘트와 물을 섞어 솜과 함께 붙이면 된다는 거예요. 정말 찰떡처럼 딱 붙더라고. 그 이후에 다시 떨어졌었는지 확인은 안해봤지만 지금까지 그대로 붙어있다고 믿지(웃음).”
그 과제물로 그는 학교서 일약 ‘스타’가 됐다. 과제를 낸 교사조차 잘 알지 못하던 공양왕고릉에 대해 조목조목 조사한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훼손된 비석을 복구한 기특한 행동 때문이었다.


“날 우쭐하게 해준 공양왕고릉이 공매처분을 당하게 됐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1966년 원당리농업협동조합 최연소(25세) 조합장으로 지역 일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공양왕고릉이 공매처분될 위기에 놓이자 진정서를 내고 고릉 살리기에 나섰다. 70년, 공양왕고릉은 사적 191호로 지정됐다. “서삼릉(사적 200호)보다도 앞서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니 대단한 일이지요.”
 
개발이 휩쓴 고양서 건져낸 역사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에 따라 일산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된 90년대언저리 이후 10년 안팎은 그가 고양의 역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시기였다. 고양문화원과 고양신문을 이끌면서 고양에 좀 더 밀착된 때이기도 했다. 89년 일산신도시 지표조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특별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자 그는 강력하게 항의하며 재조사를 요구했다. 91년 손보기 한국선사문화연구소장(2010년 작고)과 이융조 충북대 교수를 주축으로 재조사가 이뤄졌고 5000년 전 가와지볍씨가 발굴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고양의 5000년 역사가 땅속에 그대로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지하철 3호선 원당역 유치(91년), 일산밤가시초가 경기도 문화재 지정 건의(92년), 정발산 도당굿 재현 보존(92년), 문봉서원 배향 8현 제향(96년), 송강정철 시비 건립(97년), 송포호미걸이 문화재 지정 건의(98년) 등에도 나섰다. “하도 이것저것 유치하자, 지정하자 하니까 공무원들이 나만 보면 멀찌감치 피해갈 정도”였다.


그가 열성적으로 찾아다는 데가 행정기관만은 아니었다. 신도시 아파트마다 쫓아다니며 ‘고양이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지 입주민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신도시입주민에겐 여기가 타향이겠지만 그 자녀들에겐 고양이 고향이잖아요. 자식들의 고향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지. 그러고보면 그때 참 많은 일을 했어요. 한창 일할 50대였으니까(웃음).”
그중 ‘200만 호 건설에 장애가 되는 일은 절대 안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낸 원당역 유치는, 그가 가장 뿌듯해하는 성과다. 삼송~화정~일산신도시로 가려던 지하철이 원당을 거치면서 공사비는 720억원이 더 들어가고 공기는 1년이나 연장되는, “국가 철도사업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해냈다.
“원당은 주민이 많기도 했지만, 고양군청 첫 터란 상징성 때문에라도 지하철역이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청와대에서도 안된다고 한 일이었으니 쉬울 리가 있었나. 경찰서에도 두 번이나 끌려가고. 원당역 한 구석에 문구라도 적어두면 좋겠어요. ‘민의에 의해 생긴 역’이라고.” 

 

<사진 위쪽부터 시계방향> 지난달 이은만 문봉서원장의 고양문화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모임에는 그와 한 시대를 의지해온 지역 정치·행정·문화·종교 원로들과 후배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일산전철노선 변경건의(원당역 유치)를 승인한다는 고양군 회신. 그가 지금 추진 중인 송강 정철 시비 공원에 세워질 시비. 두 동강 난 공양왕고릉 비석 한 쪽을 찾아 맞추고 있는 고등학생 시절 이은만 원장. <사진=이성오 기자>

 


뇌수술 앞두고 정리한 ‘고양100인선’
신도시 개발이 마무리 된 이후에도 고양의 역사와 문화를 찾고 잇는 일에 그는 한결같았다. 대한민국막걸리축제 개최(2000년), 송강문화제 개최(2000년), 영사정 문화재 지정 건의(2005년), 북한산 산영루 복원과 문화재 지정 건의(2005년) 등 옛것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의 고양에 필요한 문화의 싹을 틔우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2011년엔 7㎝나 되는 종양을 떼내는 뇌수술을 앞두고 이영아 고양신문 대표에게 유언처럼 부탁했던 ‘자랑스런 고양100인선’도 수술 후 손수 발간했다.


2012년, 2014년 뇌수술을 두 차례 더 받고 “이젠 머릿속이 말끔해졌다”는 요즘엔 공릉천변 2.3㎞에 송강 정철의 시비 100개를 세우는 일을 추진 중이다. “송강 정철 시비공원이 조성되면, 한국가사문학의 과거·현재·미래가 소통하는 문학관광 명승지로서 금세기 최고의 문화재가 될 것”이라는 그의 말엔 힘이 넘쳤다.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추진력만큼은 젊은이 못잖은 그다웠다.


“문화운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거든. 물려받은 땅을 조금씩 팔고, 70년대 후반 강원도 옥계탄광 사장으로 4년 일하면서 번 돈으로 메꿔도 늘 돈이 아쉬웠지요. 그걸 왜 하냐는 사람은 많고 선뜻 나서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서였을까. 2011년 뇌수술을 앞두고 적어내려간 그의 온전한 비문은 이렇다. ‘남이 안하는 일만 골라서 하다가 외롭게 간 이’. ‘왜 남이 안하는 일만 골라 했냐’에 대해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어서”라고 답했다. 그 공을 알아달라는 일이 될까봐 인터뷰 하는 게 조심스럽다고도 했다. 앞장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 어디 매번 고운 시선만 받았을까.


“원당리에 전기를 끌어오고 삼릉간이역을 유치하느라 땅 1300여 평을 팔았어요. 지금 시세가 평당 2000만원이더라고(웃음). 땅은 없어졌지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삼릉간이역도 생겼잖아요. 밑진 인생은 아니지요(웃음). 고양은 강직한 선비의 고장이에요. 시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선비의 기본 정신을 지켜가도록 하는 게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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