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 행주나루와 도산 안창호의 ‘거국가’

▲ 이정은 박사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시작하며

태풍이 몰아치는데 어디 있다고 비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반 서울인 고양은 일제침략으로 인한 민족 시련기에 더욱 수도 서울과 함께 온몸으로 그 고통을 받아 내었다.

1910년 우리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곧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돌입했다. 일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결속력을 원초적으로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방침이 서울은 축소시켜 약화시키고, 지방은 통폐합시켜 약화시키는 이중전략이었다. 그 결과 서울의 4대문 안과 용산을 제외한 동ㆍ서ㆍ북쪽, 즉 마포구, 서대문구, 은평구에다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등 뚝섬부터 도봉산에 이르기까지 서울 외곽이 모두 고양군 관할이 되었다.

1936년 이들 지역이 다시 서울로 환원될 때까지 22년간은 “대(大) 고양”시대였다. 3ㆍ1운동의 함성, 서릿발같은 의열투쟁,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의 치열한 고양의 민족운동은 서울을 안고, 서울과 함께 궤를 같이 했다. 고양은 곧 서울이었고, 대한민국이었다.

제 71주년 광복절을 맞는다. 수년전 『고양독립운동사』가 발간되었고, 이제 고양시민들의 고양독립운동기념탑 건립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고양신문을 통해 고양시민과 함께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여기에는 고양 사람의 독립운동과 고양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이야기가 포함된다.


▲ 청년시절의 도산 안창호

1910년 4월 7일 행주나루. 전날밤 세브란스병원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32살의 한 망명객이 외투깃을 세우고 행주나루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에는 남북이 분단되지 않을 때여서 한강뱃길이 중요한 교통로였다.
 행주나루 강바람은 아직 차가왔다. 그러나 망명객의 마음은 날씨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도산 안창호. 중국으로 비밀리에 탈출하기 위해 전날 인력거를 빌려 타고 종일 서울 시내를 배회하며 일제의 감시망을 따돌린 후에 세브란스병원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병원을 빠져나와 행주나루로 온 것이었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와서 3년간 애국지사들을 결집하여 비밀조직으로 신민회 운동을 벌여왔었다. 이승훈, 신채호, 안태국, 이동녕, 양기탁, 전덕기, 이회영 등 많은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신민회에 참여했다. 민족교육과 민족산업, 민족언론 활동을 통해 국민주권의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고자 했었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했다.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듣자 안창호는 밤새 숙소에서 신민회 관계 서류뭉치들을 모두 태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통감부 헌병들이 들이닥쳐 평양의 대성학교를 포위했다. 배후 인물로 지목한 것이다. 도산은 평양역으로 끌려갔다. 안창호의 제자 정영도(鄭永道: 목사)는 붙잡혀가는 안창호를 따라 평양역까지 왔다가 다시 급히 학교로 돌아와 얼마간 돈을 변통하여 거리에서 배 몇 개를 사서 도산의 품에 넣어 주었다.

정영도는 서울까지 뒤따라가 한국인 헌병 보조원을 구워삶아 간신히 면회 기회를 얻었다.
“선생님 탈출하시도록 손을 쓸테니 해외로 망명하십시오.”
도산은 동지들에게 미칠 화를 생각하여 거절했다.
심문이 계속되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날 가망이 도저히 없다고 생각한 도산은 취조실 벽에 걸린 헌병대장의 일본도를 빼앗아 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헌병들은 밤새 몸부림치는 도산의 양팔을 붙잡고 자결을 저지했다. 

헌병대에서 정영도에게 급히 전달을 보내 달려와 도산을 설득하게 했다. 
급보를 받고 놀라서 달려온 정영도에게 도산은 부탁했다.
“영도야, 이제는 면회를 오지 말거라.
동지들에게 말하여 미국으로 가라. 가서 아주머니(도산의 부인)와 아이들을 돌보아 주거라.”
이동휘, 이갑 등 다른 동지들도 속속 붙잡혀 들어왔다.
애국지사들이 갇혀 있는 감방 근처에는 밤이 되면 서울의 남녀 학생들이 모여들어 도산이 가르친 애국가와 애국창가들을 합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3개월이나 불법적인 감금상태에서 온갖 고문을 받다가 1910년 1월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도산은 즉시 서울 원동(苑洞)에 있는 이갑의 집에 동지들을 불러모아 향후 방향을 의논했다.
일본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로 불리던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 사망함으로써 일본의 강경파가 시국을 주도해 갈 것이며, 그럴 경우 동지 전체의 신변이 위험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국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도산이었지만,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도산은 눈물을 머금고 해외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도산이 동지들에게 말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요. 장래를 위해 힘을 길러야 하오. 인격과 단결력을 기르고, 교육과 실업을 일으켜 민력 즉 국민의 힘을 기르는 것만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이렇게 말하며 도산은 비감한 눈물을 흘렸다. 동지들도 모두 울었다.
동지들은 국내와 해외로 임무를 나누었다. 국내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에 김구로 정했다. 대개 교육운동에 종사하여 일제의 탄압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동지들이었다.
해외는 구미지역은 안창호와 이갑, 연해주는 이동녕, 북간도는 이동휘, 서간도는 이시영, 최석하, 북경은 조성환이 담당하고, 이종호가 해외로 나가는 동지들의 자금을 주선하기로 했다.
동지들은 각자 탈출하되, 중국 산동성 칭다오(靑島)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 고양시 행주나루로 추정되는 사진. 거국가의 현장이다.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고 행주나루에 도착한 안창호는 약속대로 함께 망명할 신채호, 정영도, 김지간을 만났다. 신채호와 김지간은 배멀미 때문에 개성 근방에서 내려 육로고 가고, 도산은 정영도와 계속 쪽배를 타고 강화해협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황해도 장연으로 가서, 거기서 중국인 소금배에 몸을 숨겨서 중국으로 갔다.  
 
 이 때의 심경을 도산은 ‘조국을 떠나가면서 느끼는 마음의 노래로, 「거국가」를 지었다. 이 노래는 당시 국내외 동포들, 특히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생각하며 활동하는 해외 동포들이 즐겨 부르며 광복의 결심을 다지는 노래가 되었다. 

거국가(한반도작별가, 去國行) 이상준 작곡
1.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잠시뜻을 얻었노라 까불되는 이시운이
   나의등을 내밀어서 너를떠나 가게하니
   이로부터 여러해를 너를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오직 너를위해 일할지니
   나간다고 서러마라 나의사랑 한반도야

2. 간다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저시운을 대적타가 열혈루를 뿌리고서
   네품속에 누워자는 내형제를 다깨워서
   한번 기껏 해봤으면 속이시원 하겠다만
   나중일을 생각하여 분을참고 떠나간다
   내가가면 영갈소냐 나의사랑 한반도야

3. 간다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내가너를 작별한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때도 있을지며 시베리아 만주광야
   다닐때도 있을지나 나의몸은 부평같이
   어느곳에 가있든지 너를생각 할터이니
   너도나를 생각하라 나의사랑 한반도야

4. 간다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지금이별 할때에는 빈주먹을 들고가나
   이후상봉 할때에는 기를들고 올터이니
   눈물흘린 이이별이 기쁜일(환영)이 되리로다
   악풍폭우 심한이때 부디부디 잘있거라
   훗날다시 만나보자 나의사랑 한반도야

행주나루는 이렇게 도산 안창호, 신채호, 김지간, 정영도 선생들의 피눈물 나는 해외망명의 출발지였다.

 


 

필자소개 - 이정은 박사
서울대 및 동 대학원, 문학박사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현 (사)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사)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고양독립운동사』, 『유관순』, 『김상옥 평전』 등 다수의 논저가 있으며 매년 고양시, 광복회 고양시지회와 함께 고양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을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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