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경의선 부설과 고양

 

이정은 박사
고양을 지나가는 경의선은 서울에서 개성-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연결하는 총  499㎞인 철도다. 이 철도는 압록강철교를 통해 만주로 연결되는데, 남북이 분단된 지금 우리 철도는 서울∼고양~문산 간의 52.5㎞만을 운행하고 있다.

1896년 아관파천 기간 중 경의선 부설권이 러시아의 중재로 프랑스에, 그 다음엔 한국인 박기종의 대한철도회사에 넘어갔으나 모두 자금문제로 진척이 없었다. 이에 다시 회수해 궁내부(조선말 왕실업무 총괄 관청) 직영으로 하는 등 약 8년간 건설공사가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노골화됐다. 러일전쟁의 불길한 기운이 한반도를 감쌌다. 대한제국은 1903년 11월 23일 세계 각국에 장래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국외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다. 그후 러일전쟁 시작 2주일 전인 1904년 1월 20일에도 다시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미국·일본·러시아·중국 정부에 이를 통보하며 한국에서 전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다음날 중국의 지부(芝罘)에서 프랑스어로 국외중립 선언을 세계 각국에 타전했다. 그러나 중립은 중립을 지킬 힘이 없을 때 지켜질 수 없음을 역사가 보여 줬다. 러·일·미 등 한국의 중립화 실현에 핵심적인 국가들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거부하거나 무시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지지했다.

 

▲ 경의선 일산역은 한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간이역으로 2006년 국가 등록문화재 제294호로 지정됐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요동반도 끝에 있는 뢰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했다. 일본군은 항만 입구를 봉쇄해 러시아 함대를 묶어놓고는 그 이튿날 인천항에 기항 중이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해 격침시켰다. 2월 10일엔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의 철도부설이 급했다.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압록강 방면으로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을 이끌고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을 강박해 대한제국이 일본편에서 일본군을 돕도록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2월 23일 한일 간에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조인됐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군부의 철도부설 감독기관인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고, 3월 4일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경의선 부설공사에 돌입했다. 또한 한국정부를 압박해 50년간 철도임대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을 것”을 규정한 한일의정서를 들이대며 광대한 토지를 제멋대로 군용지와 철도부지로 점령하고 한국인들의 재물과 노동력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경의선 부설은 일본의 국권침탈 역사 그 자체가 됐다. 

▲ 경의선 열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철도박물관>
고양에 일본군의 횡포가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일본군은 고양군 화정에 병참소를 설치했다. 3월에는 일본군 군용철도대대가 고양군 차정리와 삼산리에 있는 기독교 교회당을 철도대대가 사용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했다. 교회는 일본인들이 사용할 경우 상인들이 교회에서 술을 팔 수 있고, 일요일 외에도 주중에서 2~3회 교회당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겨우 징발을 모면했다.  

1904년 6월 한국주차일본군(朝鮮駐箚日本軍) 사령관은 고양에서 임진나루까지 경의선 도로 수선에 필요한 인부와 자재로서 석공 338명, 목공 10명을 포함한 인부 580명과 다이나마이트 495kg을 고양군에 요구했다. 고양군민들은  관사에 모여들어가 돌을 던지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관리와 일본 병사들이 도망쳤다. 중앙정부 관리 이병의가 고양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파됐다.

그해 7월 17일에는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는 삼정이라는 일인이 고양군 외성동 상리(현 행주외동) 주민 집에 밤을 타서 들어가 닭을 탈취하려다 쫓겨나더니 다시 돌아와 그 집안 부녀를 겁간하려 했다. 남편은 출타 중이었고, 그 부친과  아우가 집에 있다가 일인을 꾸짖었더니 그 일인 등이 몽둥이로 난타해 부친은 죽고 동생은 중상을 입었다.

1904년 12월 서울의 일본군 병참사령관은 고양 군수에게 또다시 삼송동과  오금동 사이 숫둘고개(삼송초교 뒤편에 있는 고개) 아래 도로를 닦는 데 필요한 석수와 인부 동원을 요구했다. 한일 간에 의정서에 의해 요구하는 이상 거부할 수도 없었다. 고양 군수는 “석수는 없다”라며, 석수를 제외하고 인부들만 요구하는 대로 들어줬다. 1905년 봄과 여름 간 고양 내동 철도 수축 때에도 고양군 인부 수천 명을 계속 모집해 부역을 시켰다.
 
1905년 10월 17일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본에서 어중이떠중이들, 무모한 야심가들, 야바위꾼들이 한몫 잡을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 몰려왔다. 일본인들은 안하무인으로 갖은 횡포를 부렸다. 고양군에서 일본인 횡포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1905년 10월 26일 고양군 철도사무를 보는 아천조(阿川組)에 속한 일본인 카이타 이타로(海田伊太郞) 등 5명이 고양군 매화정리(현 덕양구 행신2동 강매동 마을)에 사는 선치승(宣致升)의 집에 들어가 그 집  닭을 잡아먹으려고 억지로 닭을 요구했다. 선치승이 거부하자 행패를 부리며 선씨를 때려 숨지게 했다.

또한 그해 11월 16일에는 고양군 주재 일본 병참소 병사 2명이 그곳에 사는 주민 손덕주를 포박해 갔다.  1907년 9월에는 일산 정거장에서 일하는 일본인이 고양의 은행정 마을(현 행신2동 강매동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겁탈한 사건도 일어났다.

 

경의선 부설공사에 동원된 일본군. <사진제공=철도박물관>

경의선 군용철도 부지로 토지가 수용됐는데 보상은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고양군의 토지가운데 126석 7두 1승락(약 2만5000평)과 47결 36부 6속(약 15만 평 이상)이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토지였다. 게다가 고양군 능동 사람들 토지 24두락이 철도부지로 편입됐는데. 아무 조처를 하지 않다가 추수 때 일본인들이 민가에 몰려와서 철도부지 내 곡물 수확의 절반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경의선은 1905년 1월 26일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됐고, 3월 29일 대동강철교가 준공됐으며, 4월 28일 청천강·대령강의 두 철교를 제외한 전체 노선이 준공돼 이날부터 용산∼신의주 간에 운행을 개시했다. 그 뒤 1906년 3월 25일 가장 난공사 지역인 청천강철교가 준공됨으로써 전 구간이 완공돼 용산에서 신의주까지 열차가 운행됐다.

러일전쟁의 필요 때문에 급하게 공사한 경의선은 부실공사, 졸속공사로 이뤄져 개통과 동시에 개량공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개량공사는 6년에 걸쳐 이뤄진 끝에 완료됐고, 1911년 11월에 압록강 철교까지 개통돼 일본의 대륙침략 발판이 됐다. 경의선은 이렇게 일본의 강압 아래 많은 주민들의 희생을 치르며 이뤄졌다. 그 중에 고양 주민들의 고통과 희생이 많이 배어있는 철로다.

 


 

이정은 박사
서울대 및 동 대학원, 문학박사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현 (사)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사)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고양독립운동사』, 『유관순』, 『김상옥 평전』 등 다수의 논저가 있으며 매년 고양시, 광복회 고양시지회와 함께 고양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엄을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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