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 고양역사문화연구소장, 전 건국대 교수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 윤씨(尹氏)의 능이 있는 운악산(雲岳山)은 예로부터 동에 금강산, 서에 구월산, 남에 지리산, 북에 묘향산, 그 한가운데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으로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침이 각기 다른 용 맥을 타고 누워있는 곳이다. 또한 그 아래로 1.5㎞ 떨어진 거리에 광릉(光陵)의 원찰(願刹)인 봉선사가 자리잡고 있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역대 어느 왕보다 당당했지만 조카와 형제, 그리고 수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에 오른 탓인지 평생을 병마와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선왕 문종(文宗)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는 단종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형수이기도 한 현덕왕후가 어느날 밤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나도 네 아들을 데려 가겠다’라는 독설과 함께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있은 다음부터 세조의 맏아들 덕종(德宗, 의경세자)이 죽고, 세조의 얼굴과 몸에 피부병이 생기는 등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 병풍석 등을 사용하지 말고 검소하게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광릉의 석실은 회벽으로 바뀌었고,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 석주에 옮겨 새겨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명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었던가. 당시 신숙주, 한명회 등 최고의 실세들이 반경 90리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전답과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조성한 능역(陵域)은 지난 500년 동안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손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 ‘광릉수목원’ 모태가 됐다.

 봉선사(奉先寺)는 969년 원래 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 탄문(坦文)이란 승려가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고 했다. 그 후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세조의 극락왕생과 선왕의 업적을 받든다는 의미로 봉선사라 했다. 당시 세조의 원찰 조성에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가는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의 고명딸 의숙공주의 부마 정현조(영의정 정인지의 아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중창의 책임을 맡았다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법회의 규모가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 법석(法席)이라는 용어는 불교의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든 말이다. 이는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이 둘러앉아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했다. 그런데 봉선사에서 열리는 법회에서는 고관들의 눈도장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전국각지에서 몰려와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는 까닭에 법당 내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열게 되니 항상 주위가 시끄럽고 산만해진다는 뜻의 ‘야단법석’이란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늘날 봉선사에는 창건 당시 주조됐다는 ‘봉선사 대종(大鐘)’과 함께 그때부터 있었다는 아름드리 고목이 남아 있을 뿐, 건물의 대부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동란 등으로 거의 소실돼 지난 60~70년대 증·개축한 건물들이 많다. 따라서 천년고찰로서의 고색창연함보다는 굴곡진 근·현대사의 아픔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이다. 무더운 여름 광릉과 봉선사의 우거진 녹음 사이를 거닐며 역사의 향기를 맡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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