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 헤이그 특사단 속의 고양 인물 송헌주

▲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특사가 파견됐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고양 사람 송헌주(宋憲澍)도 헤이그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재미동포 윤병구와 함께 세 특사를 지원하도록 미국에서 특별히 파견됐다.

송헌주는 1880년 10월 22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6년경에 관립 영어학교에서 약 5년간 공부한 우리나라 영어공부 1세대였다. 그런 어느 해에 그는 감리교로 개종하고 1903년 말경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갔다. 고학으로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하와이의 이민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며 한인상조회를 조직해 회장이 되고, 교회와 교민 교육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6년 4월 송헌주는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07년 6월 버지니아 주 세일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입학했다. 헤이그 특사단의 지원을 위해 유럽으로 간 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상설 등 특사단은 1907년 6월 24,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해 시내 바겐슈트라트가 124번지에 있는 용스(Jongs)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호텔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만국평화회의는 10일 전인 6월 15일에 시작돼 진행되고 있었다. 특사단의 목표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된 을사조약 파기와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해 국제사회의 지지와 도움을 이끌어 내는 데 있었다.

▲ 송헌주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의 대표들에게 참석할 자리는 없었다. 이준은 분(憤)을 품고 현지에서 사망했다. 이상설과 이위종, 윤병구와 송헌주는 언론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열심히 알렸다. 다행히 언론매체들은 한국에 호의적이었다. 아마도 우리 역사상 전 세계를 상대로 언론홍보 활동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첫 사례였을 것이다.

특사단은 7월 19일경 영국을 방문한 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8월 1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이준 열사의 유해를 병원에 맡겨놓고 고국으로 반입하고자 애썼다. 한국의 반일감정 분출을 우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뤄지지 못하자 9월 초 특사단은 헤이그로 돌아가 네덜란드 현지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그후 특사단은 5개월 동안 파리와 베를린, 로마,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미국을 방문해 각국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느라고 송헌주는 입학 3년만인 1910년에 로녹대학에 재입학했다. 1914년 6월에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역사학과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나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으로 초빙돼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 시절. <사진제공=유족>

1919년 3월 국내에서 거족적인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송헌주는 하와이에서 2개월 동안 3만5000달러를 모금해 이승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 등에 지원하고, 워싱턴으로 가서 구미위원부(위원장 김규식) 서기로 활동했다.

그후 그는 캘리포니아 리들리, LA 등지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을 계속 기울였다. 1929년 말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는 공동회의 7인 위원이 됐고, 1931년 만주사변이 나자 미주한인연합회를 결성해 집행부 사무장(집행위원장)이 됐으며, LA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책임을 맡아 1938년 4월 17일 낙성식을 했다. 그는 다음 해인 1939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1941년 12월) 임시정부와 미주의 외교 국방 활동에 대한 재정후원, 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 창설,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한족위원회 운영에 주력했다.

해방이 되자 미주의 한족연합회가 파견하는 한국파견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고자 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계속 LA에서 상점을 운영하다가 1965년 7월 31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해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로스데일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1942년 4월 26일,한인국방경위대(맹호군)의 LA 스프링가 시가행진.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송헌주. <사진제공=유족>

▲ 3.1운동이 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발행한 독립운동 의연금 영수증. 맨 아래 송헌주가 모집 위원장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제공=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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