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 고양 공덕리 출신 이범윤

 

▲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1903년 8월 11일 대한제국 내부 대신 임시 서리 의정부 참정(內部大臣臨時署理 議政府參政) 김규홍(金奎弘)이 광무(고종) 황제에게 아뢰기를,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신의 부(部)에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황제(皇帝)의 교화를 선포하고 호구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김규홍은 간도지방의 십여만 동포들이 청나라 사람들의 침탈을 혹심하게 받고 있으니 시찰관(視察官)으로 파견된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특별 임명하여 우리 동포를 보호할 것을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이에 이범윤에게  암행어사에게 내리는 유척(鍮尺, 놋쇠자)과 마패가 내려졌다. 고양 공덕리 출신 이범윤이 만주와 연해주 의병 운동의 큰 지도자로서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은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서 6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했고, 눈썹이 짙고 검었으며, 간도에서 산삼을 많이 먹어 눈이 붉어져 “홍안장군”이라 불렸다. 청나라 관헌들은 그를 호랑이보다 더 두려워했다. 헤이그특사 이위종의 부친인 법부대신 및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의 아우였다.

이범윤은 청국 관리들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해 군대파병을 요청하면 국제적 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사병(私兵)을 조직했다. 이로 말미암아 청국측과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청국은 이범윤의 소환을 거듭 요구했다. 분쟁확대를 꺼린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이범윤의 소환을 명하였다. 동포들은 이범윤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범윤은 동포들과 국권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생각하여 소환에 응하지 않고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 넘어 연해주 노키에프스크[煙秋]로 근거지를 옮겼다.

 

▲ 연해주 스챤지역에서 활약한 빨치산 한창걸 부대.

그해 초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범윤은 사병을 이끌고 러시아편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연해주 동포 지도자이며 자산가인 최재형(崔才亨, 在亨)의 도움을 받아 그는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여 3,000명의 대부대를 편성했다. 창의회 의병부대는 1908년부터 두만강을 넘어 갑산·혜산진·무산·회령 등 국경일대의 일제기관을 공격하였다. 안중근 의사도 이 부대의 참모중장이었다.

 

1910년 이범윤을 비롯한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과 안창호 등과 13도 의군(義軍)이라는 국내외 연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넘어 돌입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8월 들어 일본의 한국병탄이 더욱 명확해지자 8월 23일 성명회를 조직하여 8,624명의 이름으로 「성명회(聲鳴會)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병합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호소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다.  

한국을 병탄한 일본은 러시아 당국에 외교적 압력을 가해 이범윤ㆍ이상설 등 한인 지도자들을 체포, 수감 또는 유배하여 독립운동을 막았다. 이범윤은 북방 바이칼호수 옆의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연해주군지사가 쓴 비밀문서가 90년대에 발굴 공개되었다. 그 내용에서 이범윤의 활동과 위상을 엿볼 수 있다.  

“8월 21일자 아무르군사총독의 지시에 따라 10월 25일 2명의 헌병의 감시하에 조선인 이범윤이 이르쿠츠크로 떠났습니다…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이전에 조선의 관리였으며 애국심이 강한 자로 러일전쟁시 우리 측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이범윤은 항일봉기조직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항일봉기를 억제하고 인접국과의 불편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조선과 접해 있고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지역으로부터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범윤을 범죄자처럼 취급하지 않도록 하며 이르쿠츠크에서 불편없이 살 수 있게끔 지원해 주도록 지시해 주시를 간청합니다. 그 자신은 영예로운 애국자입니다만 그의 행위와 접경지역에서의 일본과의 관계로 볼 때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의 의병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해주군지사 스베틴-
 
그후 풀려나 독립운동에 제약을 받는 속에서 권업회를 조직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러일밀약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다.

3ㆍ1운동의 소식은 연해주 한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으나, 연해주는 일본군 7만 3천명의 대병력을 파병하여 시베리아를 행후 4년간 점거한다. 이로 인해 조국광복 투쟁보다 연해주 해방을 위한 항일 파르티잔투쟁을 먼저 해야 했다.  

 

▲ 만주 이주한인

1920년 청산리 대첩을 지휘했으며, 이후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연로하여 국내로 돌아와 1940년 10월 20일 마포 공덕동 39번지에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후손들은 장례에 쓸 상여를 마련할 돈이 없었다. 그보다 일제의 탄압을 더 걱정했다. 그리하여 유해를 화장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국립묘지에 있는 이범윤의 묘는 그래서 유해 없는 허묘(虛墓)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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