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 3ㆍ1운동 민족대표 이필주 목사

▲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고양군 한지면 출신의 이필주 목사는 1918년 6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8개월 만에 3·1운동을 맞았다. 그는 천도교 손병희, 장로교 길선주와 함께 감리교를 대표해 독립선언서 민족대표가 됐다.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무실은 기독교 측 민족대표를 확정짓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문안을 검토해 동의를 받았던 장소였으며, 민족대표의 순서를 정하는 회의를 했던 장소였다. 또한 2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서울시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운동을 협의했던 곳도 그의 집이었다.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1869년 12월 22일(음력 11월 9일) 고양군 한지면(현재 왕십리 569번지)의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실공장에서 실 뽑는 일로 가사를 도와야 했다.

17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삶은 고되었고 희망은 없었다. 실의를 달래기 위해 술과 싸움질로 4년 세월을 보냈다.

1890년 봄 친구의 권유로 구한국 군대 사병으로 입대해 안정을 찾았다. 규칙을 잘 지키고 기예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해 시험 때마다 승급해 말단 사병에서 하사관급의 참교(參校)로, 얼마 후 시위대가 창설될 때, 다시 부교(副校)로 하급지휘관이 됐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 진압에 동원돼 전주, 완산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한다는 현실이 괴로웠다. 나라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어지럽고, 군대는 신식과 구식 군대, 일본식 군대에서 러시아식 시위대로 바뀌어 그에게 번민을 안겨줬다. 다시 술과 싸움박질하던 옛버릇으로 되돌아갔다.

이필주 목사

1897년 28세 늦은 나이로 결혼해 남매를 낳아 안정을 찾았다. 그러던 1902년 전염병으로 갑자기 두 자녀를 잃었다. 그는 자신의 죄값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번민했다.

그때 기독교 이야기를 들었다. 남대문안 상동교회를 찾아갔다. 1년 동안 생각 없이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꿈을 꿨다. 그는 이같이 회고했다.

“꿈에 내가 죽어서 시체를 입관해 놓고 내가 시체를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네죄로 인하여 이같이 죽었느니라’ 하고 비감한 말을 하다가 잠을 깨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색잡기를 온전히 끊어버리고 아직 담배만은 끊지않고 기도를 힘써하고 세례문답 공부와 개인 전도에 힘을 많이 썼다.”

1919년 3월 30일,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군중. <대판조일신문, 야마모토 특파원 촬영>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를 만나 상동교회 교인이 됐다.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전도에 나섰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죽고야 말리라”며 위협 반, 설득 반으로 식구들에게 전도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정성스럽게 전도를 해 몇 달 안가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성경을 보다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태복음 6: 33)는 말씀을 읽고 군복을 벗어 던졌다.

1903년 겨울, 상동교회에서 예배당 청소부 자리를 내어 줬다. 청소일 틈틈이 전덕기로부터 열심히 성경을 배웠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자 상동교회가 본부가 돼 우국지사들이 모였다. 이필주도 구국운동의 중심에 한 발씩 다가가게 되었다. 그가 맡은 학생들이 체조시간에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훈련광경은 서울에서 구경거리가 됐다.

정동제일교회

1911년 마흔이 넘은 나이로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1913년에 왕십리교회의 전도사로 파송됐다. 1915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8년 독립운동을 위해 휴직한 손정도 목사의 후임으로 정교회 목회자로 부임해 3·1운동을 맞게 됐다.

그는 평생 신앙과 민족적 양심을 지키는 목회자로 살다가 1942년 4월 21일 7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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