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신채호 선생 부인 박자혜 여사

서울 인사동길 남쪽 끝에 소공연이나 행사를 위한 작은 무대가 있다. 여기서 건널목을 건너면 탑골공원이다. 이 건널목 한복판쯤 지번이 인사동 69번지다. 지금은 도로 한가운데로 편입된 이곳을 지날 때마다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고단한 삶을 생각한다. 박자혜 산파소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1928년 12월 12일 동아일보 지면을 보면 이런 머리기사가 보인다. 쉬운 말로 고쳐 쓰면 다음과 같다.

 “찬 방바닥에 주린 창자 쥐고

어머니 무릎에 두 아들은 울어대고

....신채호 부인 방문기”

제목부터가 심금을 울리는 기막힌 사정을 예고하고 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 돈을 벌어 보기는커녕 간판 붙여 놓은 것이 도리어 남이 부끄러울 지경임으로 자연 그의 아궁이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 될까 말까 하여 말과 같은 '삼순구식(三旬九食 : 30일에 9끼, 매우 곤궁하다는 말)'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 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가 있는 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박자혜 여사는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에서 태어나 5살에 궁중의 아기나인이 됐다. 궁궐에 들어간 지 10년, 나라가 망하자 궁중의 고용인에 대한 요즘 말하는 ‘구조조정’으로 15살 소녀 박자혜도 해직됐다. 궁녀 신분을 벗은 박자혜는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조산원 훈련을 받고 총독부 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병원마다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박자혜는 간호원들로 간우회를 조직해 부상자들을 돌보며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풀려나자 휴가를 내고 압록강을 넘었다.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북경의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것이다.


당시 북경에 이회영 선생이 있었는데, 부인 이은숙 여사가 1920년 봄 24살의 처녀 박자혜를 신채호 선생에게 소개했다. 신채호 선생은 부인과 사별하고 10년째 홀로 살고 있었다. 신채호, 박자혜 부부는 북경의 금시방가(錦什坊街)에 셋집을 얻어 가정을 꾸렸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둘째를 가지게 되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신채호 선생은 부인과 아이를 국내에 들여보냈다. 국내에서 박자혜는 연락관계를 맡아 남편을 도왔으며, 나석주 의사를 도와 서울 시내 길 안내를 하기도 했다. 1927년 북경으로 가서 남편을 다시 만났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됐다.

신채호

북경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힘쓰던 신채호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계획하다 1928년 5월 8일 붙잡혀 10년 형을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두 아이 부양에 옥바라지까지 하게 된 박자혜의 생활은 곤궁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옥중의 남편은 감옥안이 너무 추워 솜누비옷을 좀 보내 달라고 했는데, 그걸 보내 줄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매달 6원 50전 하는 월세를 석 달이나 못내 독촉을 받았다. 산파업이 잘 안되자 풀장사, 참외장사를 하기도 했다.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옥중의 남편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다. 옥중의 신채호로부터 이런 답장이 왔다.

“내 걱정을 마시고 부디 수범 형제 데리고 잘 지내시며, 정 할 수 없거든 고아원으로 보내시오.”

1936년 2월 21일 신채호 선생은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와 장례를 치른 박자혜는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했다. 큰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가고,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사망했다. 홀로 남은 박자혜 여사는 1943년 셋방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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