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선생의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남명 조식의 말년 남명문하를 주도하면서 율곡으로부터 ‘청렴개결하길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돼 옥사했다. 곧 바로 신원이 회복돼 대사헌에 추증됐고, 묘소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고양시 고양동 목암리 모 군부대 영내의 선산에 모셔져 있다. 

목암(木巖)은 예로부터 나무와 바위가 많아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고양의 역사를 대표하는 곳으로 지금도 서울과 파주, 양주, 의정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다. 부대 초소에서 5분가량 좁은 산길을 따라 오르면 수우당(영경)과 호조참의를 역임한 천민당 여경((天民堂, 餘慶) 형제의 유택이 당시 영의정 정인홍(鄭仁弘)이 세운 비석과 함께 보인다. 바로 그 위쪽에 병조좌랑을 하신 부친 휘 세준(世俊)의 묘가, 그 좌측으로는 사헌부감찰을 거쳐 외직인 교하현감으로 물러나 이곳에 선산을 마련한 조부 휘 훈(壎) 공의 묘가 있다. 

수우당의 가계는 조선조 초에 병조참의를 지낸 원지(元之)공의 8대손이자, 통정대부 대사성을 지낸 사로(士老)의 5대손이다. 또한 고조부 한정(漢禎)은 예조참의, 증조부 중홍(重弘)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렇듯 수우당은 선대로부터 조부, 선친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살아온 사대부 집안에서, 중종 24년 한양 원동리(창경궁 인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수우당은 당쟁이 파다한 세상에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경(敬)과 의(義)를 자신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아 중후한 인품과 학문으로 빛을 발한 인물이다. 

수우당은 선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외가의 전장(田莊)이 있는 진주 도동에 은거하며 처사(處士)의 삶을 즐겼다. 이때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붕당을 만들기를 제안했으나 이 또한 사양했다. 여기에 선조가 사헌부 지평, 교정청 낭관 등의 관직을 또다시 제수하자 사의 표명과 함께 붕당의 폐단에 관한 소(疏)를 올렸다. 이때 마침 누이와 조카 등 외척의 힘을 업고 자존망대에 빠져있던 정철이 수우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나기를 청했으나 수우당은 그가 색성소인(索性小人)이란 이유로 거절한 때이다. 여기에 앙심을 갖게 된 정철은 어사 오억령에게 수우당의 죄상을 만들도록 사주했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정철과 성혼 등은 그물을 보다 넓게 멀리 치기로 작정하고 그를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얽어 넣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우당의 인물됨을 알고 있던 류성룡, 이항복 등이 그의 처벌을 반대하자 정철은 서둘러 옥리를 매수해 독주(毒酒)로 수우당을 옥사시켰다. 훗날 선조는 흉혼독철(凶渾毒澈)이란 말로 성혼과 정철에 속아 죄 없는 선비를 죽게 만들었다고 탄식했지만, 당시 수우당의 죽음은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송익필의 작품이란 설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大東野乘』). 수우당의 묘갈명을 지은 내암(萊菴) 선생 역시 ‘공(公)은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고고하게 살기를 원했건만, 간흉(奸凶)들이 쳐 놓은 흉계에 걸리어 억울하게 천수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현재 수우당의 위패는 그가 생전에 건립했던 경남 산청 덕천서원에 남명선생과 함께 배향돼 있고, 그가 강학을 펼쳤던 진주 선학산 기슭 도강서당에는 선조대왕의 사제문비(賜祭文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78호)가 있다. 저서로는 ‘수우당 실기’, ‘수우당 최영경’ 등이 있다.

 






 최재호 고양 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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