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 - 고양지역 의병항쟁

우리나라에는 나라가 국방의 제 역할을 못할 때 민간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전통이 이어져왔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들이 일어났고,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광무황제(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다시 의병항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고양에서는 군대해산 3개월 후인 1907년 11월 14일에 첫 의병전투가 일어났다. 이날 의병 수십 명이 고양순사분파소를 습격했다.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의 의병진이 약 100명에 달했으며, 대응에 나선 일본군이 의병부대를 파주쪽으로 밀어붙여 사망 2명, 부상 15~16명에 말 6필, 소 2두, 화승총 23정, 칼 1자루 화살 9개를 노획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의병의 주 무기가 화승총이었으며, 활을 활용하기도 하는 등 무장이 매우 빈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무기의 열세 때문에 의병들의 전투는 번번이 큰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그러나 의병의 정신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더욱 숭고한 동기에서 나왔다.

1908년에 들어 고양의 의병활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1908년 1월 12일 의병들은 하도면 축리에서 순사 이조우를 총살하고, 1월 27일에는 고양군과 양주군 사이의 부곡하리에서 의병 100여 명이 일본군 우편호위병 5명을 습격했다. 2월 17일 고양군 배다리(현 주교동) 등지에서 의병 10여명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4월 12일에는 고양군 기울리에서 의병 200명의 대병력이 고양헌병분견소 헌병과 접전을 벌였다. 그 며칠 후 한석장터에 의병 100여 명이 나타나 군자금으로 5000냥을 받아 갔다. 4월 13일 밤에는 유춘렬이 인솔하는 의병 22명이 고양군 구지도면 이패리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군자금 6만냥과 총 20정의 조달을 요청했다. 고양은 의병들의 중요한 전투지원처였다.

4월 들어 의병들의 기세가 더욱 커지자 서울의 헌병대사령부는 헌병 100여 명을 3대로 나눠 1대는 양주, 2대는 고양, 3대는 문산포로 출동시켰다.

의병운동자 처형 장면.

5월 8일에는 경의선 수색정거장쪽 방향으로 약 4㎞ 떨어진 곳에서 의병 20여 명이 고양 헌병분견대 소속 헌병과 교전을 벌였으며, 5월 18일 고양 서남방 2리 남짓에서 의병 수십 명이 고양군분견소 일본 헌병과 총격전을 벌어져 의병 12명이 사살됐다. 5월 20일에도 수십 명의 의병이 고양군 지도면 화수리에 나타나 고양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대와 교전했으며, 이때 의병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7월 16일에는 일산리에서 의병 3명이 일본 척후병 3명, 헌병 1명과 총격전을 벌였다. 8월 21일 일산리 서쪽에서 의병 5명이 고양군 헌병분견대 헌병 9명과 총격전을 벌였다. 9월 27일 고양 동북 1.2㎞ 되는 곳에서 의병 10여 명이 고양 주재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다.

10월에는 고양군·양주군 지방에서 의병장 황재호가 이끄는 의병이 빈번하게 출몰했으며, 고양군 지역에서 일본 헌병대와 충돌했다.

의병 학살 장면.

1908년 한 해가 격동과 소요 속에서 저물어 갔다. 12월에 들어 고양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각지의 의병이 더 자주 출몰하고 그 수효도 더 증가했다. 군민들의 생활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양군수 최홍석은 각촌으로 다니며 자기 월급을 털어 피해 가족을 도왔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1909년에도 이와 같은 양상으로 의병전투가 고양지역에서 이어졌다. 고양은 의병투쟁의 장이 되었고, 의병부대에 식량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지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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