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상만 인권운동가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적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다. 지진 안전지대로 믿어왔던 우리나라에서 지진에 대한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북 경주에서 일어난 잇따른 지진으로 인명과 재산의 손실까지 일어나 그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감 여파로 인해 요즘 불티나게 팔리는 물건이 있다고 한다. 명칭도 생소한 이른바 ‘생존 배낭’이 그것이다. 지진 등 재해로 인해 무너진 건물에 갇히거나 또는 급하게 집을 벗어나 생활하게 될 경우 일정 기간동안 생활할 수 있도록 생필품이 담긴 배낭, 그것을 이른바 ‘생존 배낭’이라고 하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가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존 배낭’을 챙기는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떠 오르는 단어는 아마도 하나일 것이다. 바로 ‘각자도생’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제각기 살아 나갈 방도를 꾀함’이라는 뜻인 각자도생은, 사실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그 불신은 국민들 사이에서 더욱 깊어진 것 같다. “국민이 위기에 빠지면 국가가 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결정적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에 “너무 지나친 불신 아니냐”며 타박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불신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불신은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로서는 엄청난 지진 재난이 경주에서 발생했으나 이러한 재난에 대응하고자 만든 국민안전처의 대처는 무능을 넘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에게 재난 사실을 알리는 문자 발송이 제때 발송하지 않은 문제도 심각했지만 더 심각한 일은 또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국회의원이 기상청을 통해 입수한 ‘국가 지진화산 센타 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지진 발생이 심야일 경우 환경부 장관과 차관, 그리고 기상청장과 차장에게는 ‘가급적 다음날 아침에 보고하도록’ 정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재난 대응 매뉴얼을 접하며 국민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각자도생’, 자기가 알아서 자기 살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불신 풍조는 두말 할 나위없는 비극이다. 그러면서 나는 뜬금없이 과거 명절때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 줄을 섰던 장면을 떠 올랐다. 그때 언론에서는 늘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새치기 문제를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새치기가 벌어지는 근본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새치기가 벌어지는 이유는 권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믿고 있으면 반드시 공정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 반드시 내 이익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기에 각자도생, 자기가 자기 살 길을 어떻게든 찾아 나서야 한다는 불신이 사실은 ‘새치기의 근본 원인’이 아니었을까? 바로 지금이 그런 불신의 결정판인 것 같아 몹시 씁쓸하다. 하지만 이를 깨달아야 할 정부와 책임자의 태도는 여전히 안이해 보인다. 경주에서는 지진 여진이 계속되고 있지만, 지적되고 있는 뒷북 재난 안내 문자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를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국민이 원하는 것은 안전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다. 각자도생, 이 단어를 머리에서 지우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정부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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