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공간 9 - 숲속의 섬

백마 카페촌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카페 '숲속의 섬' 의 실내공간.

1980년에 문 연 일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숲속의 섬으로 들어서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긴 마당을 지나야 한다. 무성한 나무 울타리와 차곡히 쌓인 장작더미의 호위를 받으며 바닥에 깔린 철도 침목을 밟다 보면 마음의 시계바늘이 과거를 향해 돌기 시작한다. 풍동 애니골 초입에 자리한 카페 ‘숲속의 섬’은 마음 한 구석에 얌전히 보관해 둔 추억을 들춰 주는 곳이다. 마당 초입에 서 있는 입간판의 마중글이 공간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준다. ‘옛날처럼 기차를 타고 한 번 와 보세요.’ 일산신도시가 조성된 때가 1995년인데 옛날이라니, 대체 언제를 말하는걸까? 역시 간판에 답이 있다. SINCE 1980.

1980년에 문을 연 숲속의 섬은 백마, 풍동의 터주대감이다.

오래된 물건들이 제 자리 지키는 곳 

동행 중 한 사람은 숲속의 섬 실내공간의 첫인상이 유럽의 고풍스런 시골 농장의 창고 같다고 했다. 가 본적은 없지만 그럴듯하게 들렸다. 높게 트인 천장과 세로로 긴 격자무늬 창, 나무를 잇댄 기둥, 붉은 벽돌로 쌓은 벽···.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은 두툼한 나무 테이블위에 그림자를 남기기도 하고, 오래된 풍금 위에 잠시 머물며 건반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공간속의 모든 풍경을 따사롭게 만들어주는 가을 햇살의 쓰임새가 아주 알뜰하다. 테이블에는 작은 꽃사발이 하나씩 놓여 있다. 사발 안쪽의 작은 고리가 앙증맞은 들풀을 살짝 잡고 있다. 아침마다 주인장이 뒤뜰에서 들풀을 꺾나보다.

카운터 뒤편에 놓인 오래 된 턴테이블과 레코드판. 단골들이 오면 신청곡을 틀어주기도 한다.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오래 된 물건들이 의젓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석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시집들이 빼곡이 꽂혀 있고, 아프리카에서 가져왔다는 100살이 넘었다는 피아노도 놓여있다. 한쪽에는 숲속의 섬을 다녀간 이들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 한 가득 쌓여 있다. 한지를 정성스레 묶어 만들었다. 얼추 헤아려도 수십권이다. 페이지를 펼쳐보니 짧은 감상을 적은 이도 있고, 함께 온 누군가와의 소중한 시간을 잡아두려는 애절함도 담겨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진흙을 발라 만든 벽난로에서 장작 연기가 피어오르리라. 카운터 뒤에 놓인 턴테이블도, 벽면을 가득 채운 LP 음반들도 장식품이 아니다. 지금도 단골 손님이 와서 특별 신청을 하면 빙글빙글도는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얹어준다. 새로움의 강박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곳, 바꾸지 않아서 오히려 느긋해지는 곳이 숲속의 섬이다.

오래된 피아노와 풍금을 비롯해 눈길 머무는 곳마다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마 카페촌의 역사 고스란히 간직해 

숲속의 섬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이름, 백마 카페촌이다. 지금도 경의선 기차역과 아파트 단지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 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백마 카페촌은 특별한 이름이었다. 신군부의 엄혹한 통치 속에서 울분을 삭이며 탈출구를 찾던 청춘들에게 백마는 작은 해방구였다. 신촌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능곡 들녘을 지나 백마역에 내려 건널목을 건너면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카페들이 펼쳐졌다. 화사랑, 고장난시계, 썩은 사과 등···. 이름은 카페였지만 주로 막걸리나 동동주를 마시는 학사주점 분위기였다. 젊은이들은 이 곳에서 낭만을 즐기기도 했고, 삼삼오오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백마 카페촌이 가장 유명세를 탄 시절은 80년대 후반이었다. 신인 연기자 황신혜를 일약 인기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첫사랑’ 이라는 드라마에 소개되며 명성을 얻었던 것. 

최근 드라마에도 등장했던 숲속의 섬의 명당자리.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정겹다.

백마에서 이름난 카페를 운영하던 주인장은 가게들을 형제들에게 맡기고 조금 떨어진 숲속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고벽돌로 벽을 쌓아 천장이 높은 집을 한 채 지었다. 지금은 일산동구 풍동이지만 옛 주소는 고양군 일산읍 마두리였단다. 숲속의 섬이라는 가게 이름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정말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깔끔한 손맛에 넉넉한 인정까지 품은 주인장의 장사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젊은이들이 소문을 듣고 철길을 따라 다리품을 팔아 이곳까지 오곤 했다. 숲속의 섬에는 백마 카페촌의 흥청거림과는 다른 호젓한 낭만이 있었다. 오래잖아 대학생들이 문학발표호나 시낭송회를 여는 명소가 됐고, 울분을 토하며 시국을 토론하기도 했다. 그 때 단골이 되어 가게를 찾았던 이들 중 지금은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인이 된 이도 여럿이다.

하지만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백마 카페촌도 사라졌다. 선견지명이었을까. 외톨이처럼 동떨어져 있던 숲속의 섬이 오히려 사라진 백마 카페촌을 추억하는 마지막 담보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카페들이 숲속의 섬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새로운 식당들도 하나 둘 문을 열었다. 그렇게 애니골이 만들어졌다. 숲속의 섬은 철길 건너의 마을이, 나중에는 섬 주변의 숲이 하나 둘 변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논과 밭, 그리고 숲이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화려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숲속의 섬은 꿋꿋이 자리를 지켜줬다. 덕분에 오늘의 풍동 애니골은 추억속의 이름 백마 카페촌에 자신의 호적을 주장할 근거를 얻는다. 고마운 일이다.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운 공간

공간의 연륜과 어울리게 차림새도 격이 맞는다. 예전처럼 술과 안주를 팔지 않는다. 대신 차의 종류가 다양하고 맛도 훌륭하다. 우전차나 작설차 등 녹차류는 지리산의 이름난 다원에서 가져온다. 오미자와 매실 등의 과실 차는 직접 청을 담가 낸다. 국산팥을 갈아 만든 팥빙수도 사철 내내 맛볼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눈꽃빙수가 아니라 얼음도 팥알도 성긴 옛날 빙수 스타일이다. 커피는 학림커피라는 이름을 달았다. 1956년부터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학림다방에 헌정하는 이름이다. 

숲속의 섬의 차림상. 소박하면서도 깊은 맛과 향을 품었다.

봄에 숲속의 섬에 들렀을 때 만났던, 초코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세상과 인사했단다. 열 여덟 해 동안 숲속의 섬의 마스코트 노릇을 했으니 고양이로서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더미 사이에 예쁘게 묻어주고, 그 위에 노란 들국화 한 송이 옮겨 심어 놓았다. 그렇게 숲속의 섬엔 또 하나의 작은 역사가 보태졌다. 

시간과 함께 추억과 이야기가 한겹씩 쌓이는 곳.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벽을 덮은 담쟁이가 붉게 물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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