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공간 10 -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

 

출판도시를 상징하는 공간인 '지혜의 숲'은 양서의 저장고, 열린도서관, 만남의 공간 기능을 모두 아우른다. 사진은 지혜의 숲 제2구역.


20세기의 위대한 문호이자 환상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자신이 사랑한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엄선한 컬렉션에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도서관은 보르헤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파라다이스였다. 지난해 고양에서 대중강연을 열었던 고전학자 고미숙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꿈속에 천국에 가 보았다며, 천국에서 지내는 이들이 뭘 하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묻더니 스스로 이렇게 답했다. "모두들 책을 읽고 있더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꿈꾸는 낙원을 현실에서 가장 근접하게 구현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 파주출판도시의 문화적 심장인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자리한 열린도서관 ‘지혜의 숲’을 찾아가 보자.
  
지식인과 출판사에서 기증한 양서 가득
숲은 참 묘하다. 인공적인 구조물은 크기에 비례해 상대를 위압하지만, 숲은 반대다. 수목이 우거지고 가지가 울창할수록 발을 들이는 이에게 아늑함을 허락하지 않던가. 지혜의 숲도 마찬가지다. 벽을 따라 광활히 이어진 서가는 밀생하는 나무들이고,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은 푸르른 가지이며 잎싹들이다. 숲길이 누구에게나 품을 열어주듯, 지혜의 숲 입장객에게도 문턱이 없다. 누구든 자유로이 찾아 와 책의 숲이 뿜어내는 맑은 정령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책으로 높이 쌓아 올린 거대한 성채를 연상케 하는 지혜의 숲 제1구역.  

 

같은 숲이라도 솔숲의 풍경과 떡갈나무숲의 풍경이 다르듯, 지혜의 숲도 서로 다른 색깔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1구역은 국내의 학자와 지식인들이 기증한 도서가 소장된 곳이다. 한없이 높은 정사각형 서가가 벌집처럼 층층이 쌓였다. 세어보니 자그마치 16층이다. 굳이 꺼내 읽지 않아도 기증자의 이름과 소장된 책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읽고 밑줄 그은 책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누군가의 족적을 살피는 아주 의미 있는 방법이겠다. 비록 학자나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개인적 독서이력에 근사한 책 이름을 부지런히 보태고 싶어진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서체험 즐겨
높은 산에서 생태적 다양성이 가장 충만한 곳은 중산간지대인 것처럼 지혜의 숲 역시 2구역이 독서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자사에서 만든 책들을 기증해서 서가를 채웠다. 출판사마다의 특성을 살피며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으니 애서가들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단순함 속에서 변화를 추구한 서가의 심플한 디자인은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막힘 없이 탁 트인 실내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테이블이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로 만든 독서대의 질감이 매끈하고 정겹다.   

 

쾌적한 테이블 위에 독서를 더욱 편하게 해 주는 독서대도 놓여 있다.  

 

정숙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지혜의 숲에선 가벼운 대화와 행동이 자연스레 허용된다. 공간의 품이 넉넉한 덕분이다. 청각을 자극하지 않는 적당한 음악소리도 배경음으로 깔린다. 수런거리는 대화와 뒤섞인 적정량의 백색 소음이 독서의 집중력을 오히려 높여준다. 이용자들의 모습도 다채롭다. 누군가는 처음 방문한 듯 호기심에 반짝이는 시선으로 공간의 매력을 눈에 담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친숙하고 편안한 자세로 자신만의 독서에 몰입하고 있다. 각자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결코 누구도 외롭지 않은 집단 독서의 체험을 지혜의 숲은 가능케 해 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는 모험과도 같다. 그대, 무엇을 찾으려 하는가? 

 

물론 지혜의 숲에서도 몇 가지 규칙들은 있다. 읽은 책을 스스로 제자리에 꽂는다거나, 카페에서 구매한 음료나 음식을 먹을 때 책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한다는 것 정도다. 당연히 지켜야 할 사항들이다. 숲을 사랑하는 이들이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불을 피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눈을 들어 통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니, 건물을 둘러싸고 흐르는 샛강의 갈대가 서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제3구역에선 밤샘 독서 즐길 수 있어
지혜의 숲에선 책뿐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 정보도 풍성하다. 구석 구석 숨어있는 리플렛이나 소책자 등을 통해 출판이나 문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소식을 얻을 수 있다. 숲의 모습을 좀 더 세심하게 즐기고 싶으면 권독사들의 도움을 받아보자. 책의 선택과 안내를 돕거나, 여러 가지 독서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이 권독사들이다. 책이라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지식 생태의 신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해 주는 특별한 숲 해설사들이랄까. 
지혜의 숲 3구역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의 게스트하우스인 지지향의 라운지를 겸한 곳이다. 1, 2구역에 비해 좀 더 고급스럽고 차분하다. 누군가와 품격 있는 만남을 갖기에 제격이겠다. 물론 이곳에도 책은 지천이다. 3구역만의 놀라운 비밀은 한밤중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는 점이다. 밤샘 독서를 꿈꾸는 올빼미들에게는 심야 천국이 따로 없다. 조만간 다음날 오전에 낮잠을 잘 수 있는 날을 골라 책장을 넘기며 밤을 지새워보리라.  

 

제혜의 숲 제3구역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의 라운지를 겸하는 기능에 걸맞게 분위기가 한층 고급스럽다.  

 

잡념은 비우고 의욕은 채우고
탄현동에서 왔다는 한 가족과 인사를 나눴다. 아빠 고광민씨와 엄마 이희정씨는 아들 도현이의 돌을 맞아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나들이를 하다가 지혜의 숲에 들렀단다. 예쁜 사진을 얻고 싶어 들렀지만, 아빠 엄마가 공간의 매력에 반해버려 사진도 찍고 책도 펼쳐보며 긴 시간을 머물고 있었다. 어느새 도현이는 아빠 품에서 편안히 잠들었다. 엄마는 도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을 고르느라 맘이 설렌다. 지혜의 숲에 처음 들렀다는 아빠는 아이가 책과 친하게 자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새겼다고. “정말 멋진 곳이네요. 아이뿐 아니라 우리 부부도 가끔은 오늘처럼 맘의 여유를 찾아가며 살고 싶네요.”

 

탄현동에서 온 고광민, 이희정씨 가족. 아빠 품에서 잠든 도현이의 돌을 즈음해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자 지혜의 숲을 찾았다.


책에 목마른 이들이 지혜의 숲을 찾아와 자신만의 소중한 쉼표를 찍고 가는 모습은 기름진 숲에 다양한 생명들이 깃들어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았다. 취재를 빌미로 지혜의 숲에서 빈둥거리다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창 밖 샛강의 갈대숲에도 어둠이 깃들었다. 이런 저런 잡념과 고민거리들이 잠시 망각된다. 책을 심어 가꾼 신비로운 숲은 부질없는 조바심에 대한 축소와 삶의 결에 대한 확장을 동시에 촉발한다.

 

 

애서가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의 모습이 궁금하면 지혜의 숲에 들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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