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기행>

최 재 호
고봉 역사문화연구소장, 전 건국대 교수
천고마비라는 말은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으로 가을을 표현하는 대표적 사자성어다. 어디 구슬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쨍그랑하고 깨어질 것만 같은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이 연일 계속 되고 있다. 이럴 때 누구나 한번쯤 되새겨 보는 말이 ‘천고마비’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그렇게 낭만스럽게만 태어나지는 않은 듯하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해 중국 북방에 터를 잡아온 흉노(匈奴)족은 은(殷)나라를 거쳐 주(周), 진(秦), 한(漢)의 삼왕조(三王朝)와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중국의 북쪽 변경 농경지대를 끊임없이 침공해 약탈을 일삼았던 강인하고 용맹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항상 고심했고, 전국시대에는 연(燕), 조(趙), 진(秦)나라가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중원의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이 기존의 성벽을 수축하고 연결해 만리장성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기동력이 강한 흉노의 침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흉노족은 중국의 북쪽에서부터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일대에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타고난 기마민족이었다. 이같은 흉노로서는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 동안 먹고살아야 할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행히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잘 먹은 말들은 가을이 되면 토실토실하게 살도 오르고 힘도 좋아진다. 겨울이 되기 직전, 튼튼해진 말을 타고 번개처럼 국경을 넘어 들어가 곡식이며 가축을 탈취해 바람처럼 사라지는 흉노를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중국의 각 왕조나 백성들로서는 언제 또다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경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활줄을 갈아매고 활촉과 칼을 갈며 경계를 강화시켜야 했다. 여기에 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도(蘇味道)를 위로하기 위해 적어 보낸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오늘날 천고마비란 사자성어를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이 떨어지고[雲淨妖星落]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

말안장에 의지하여 영웅의 칼을 움직이고[馬鞍雄劍動]

붓을 휘두르니 격문이 날아온다[搖筆羽書飛]

 

사서(史書)에 의하면 로마제국과 유럽대륙을 떨게 만들었던 훈족(The Huns)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흉노족은 과연 우리와 어떤 관계일까? 일찍이 천재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한민족과 흉노족은 ‘뿌리를 같이하는 분리된 동족’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신라를 세운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나,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를 비롯해,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 등이 모두 흉노족의 후예다. 실제로 조선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민족과 흉노족 사이에는 언어나 생활양식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부분 같거나 유사했다고도 한다.

천랑기청(天朗氣淸)!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아 마음까지 상쾌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안타깝고 우울하기만하다. 그 옛날 만주벌판을 달리던 기상을 하루빨리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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